시험발사되는 무수단 중거리 탄도미사일. 노동신문 |
이같은 사실은 북한 핵 위기가 시작된 1990년대 초반부터 20여년 동안 지속된 북한의 비핵화 노력이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이 핵과 탄도미사일 전력을 관장하는 전략군 1만명을 편성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북한의 핵위협은 정치, 외교적 차원을 넘어 군사 작전 분야로 치닫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가 서울 도심을 향할 지, 부산 등 미군 증원전력이 들어올 항구를 노릴 지, 일본과 괌 소재 미군기지를 공격할 것인지에 따라 한미 군 당국의 대응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해 군 당국이 고민하는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 위치한 북한의 핵실험장. |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 핵보유국들이 구사하는 핵전략은 냉전 시절 미국과 구소련의 핵 경쟁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공격을 받은 만큼 보복한다는 ‘상호확증파괴’부터 적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추구 하는 최대억제, 적의 선제타격 이후 반격을 꾀하는 2격(second strike) 능력을 중시하는 최소억제, 폭격기와 탄도미사일과 SLBM으로 구성된 3축 핵 체제가 이때 등장했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핵전략은 미국 등 기존의 핵보유국과 이란, 인도, 파키스탄을 비롯한 신흥 핵 국가들의 대립으로 구도가 바뀌었다. 기존에는 예측 가능한 핵전략이 사용됐다면 지금은 이론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에 기반하는 핵전략이 사용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며,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고, 핵 기술 수준이 부족한 신흥 핵 국가들의 핵 전략은 그만큼 취약하다는 평가가 많다. 때문에 이들은 선제 핵공격보다는 2격에 비중을 두면서 최소한의 핵 억제력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북한군 병사들의 개인장구류를 검열하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노동신문 |
지난해 5월6일 노동당 7차 대회 중앙위원회에서 김정은이 발표한 사업총화(결산)보고를 살펴보자. 김정은은 “침략적인 적대세력이 핵으로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이미 천명한 대로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자주권 침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선제 핵공격 가능성을 닫지 않음으로서 핵전략의 불확실성을 최대한 끌어올리겠다는 의미다. 같은해 3월10일 북한은 황해북도에서 강원도 원산 동북방 북한 지역 동해상으로 단거리 탄도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 노동신문은 “이번 탄도로켓 발사훈련은 해외침략무력이 투입되는 적 지역의 항구들을 타격하는 것으로 가상해 목표 지역의 설정된 고도에서 핵전투부(미사일 탄두 부분)를 폭발시키는 사격방법으로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주요 군사시설에 대해 전술핵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 1일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ICBM 시험발사준비가 마무리단계에 이르렀다고 주장했고, 북한 외무성은 “임의의 장소에서 ICBM을 발사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마음만 먹으면 미국 본토를 언제든 핵공격할 수 있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은 것이다.
이같은 태도는 시스템에 기반해 핵무기를 운영하는 미국이나 핵무기의 존재 자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과는 확연히 다르다. 기존의 핵전략 이론으로는 해석하기 쉽지 않다. 김정은은 마치 아이가 손에 잡히는 장난감을 닥치는 대로 던지며 화를 내는 것처럼 전략핵과 전술핵 카드를 모두 꺼내면서도 구체적인 것은 철의 장막 뒤에 숨기면서 불확실성을 높인다.
비상활주로에 착륙하는 북한 공군 미그-21 전투기. 노동신문 |
◆ 북한 핵전략 파악 못하면 첨단 무기도 소용없다
북한의 핵전략이 불확실성에 기반하면 가장 난감한 것은 우리 군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한미 군 당국과 북한 수뇌부는 핵무기 사용 시기를 저울질하며 상대의 선제 핵공격이 있을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다.
북한이 언제,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핵무기를 사용할 지 사전에 알지 못하면 킬 체인과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KAMD)는 무용지물이다. 북한 핵무기의 첫 공격목표가 서울일지 미군 증원전력이 들어오는 부산항일지에 따라 한미 연합방위태세는 물론 우리 군의 미사일방어전력 배치 등 전술적 요소까지 모든 것이 달라진다. KAMD가 남한 전역을 커버할 수는 없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에 따라 방어자산을 배치해야 하지만 북한 핵무기가 어느 곳을 향할지 알 수 없다면 수십조원을 들여 남한 전역에 KAMD를 설치할 수밖에 없다. 국방예산 사정을 고려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다.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북극성’이 수면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노동신문 |
북한의 핵전략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는 상황에서 북한군과 미군의 핵 게임이 치열하게 전개되면 우리 군은 말 그대로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한미 연합방위태세와 우리 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은 양국 대통령을 정점으로 양측 군 수뇌부가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가동되는데, 냉전 시절부터 핵전략을 연구해온 미군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북한 핵공격에 대응할 핵무기 사용계획을 단기간에 수립할 수 있다. 그렇게 작성된 작전계획이 우리 군에 전달됐을 때, 한반도 실정에 맞는지 북한 수뇌부의 의식 구조가 올바로 반영됐는지 북한의 추가 핵보복이 우리 영토를 향할 지 등을 검증해야 하지만 북한의 핵전략을 모르면 군 수뇌부는 검증할 방법이 없다. 우리 영토에 2발 이상의 북한 핵탄두가 떨어질 위험을 끌어안은 채 미군의 의도에 넘어갈 위험도 있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KN-08 개량형이 평양 김일성 광장을 가로지르고 있다. 노동신문 |
하지만 우리 군에서 이같은 ‘상상의 산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형 3축 체계와 KMAD 등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개념은 넘쳐나지만, 정작 북한이 어떻게 핵무기를 사용할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략자산 상시배치’를 언급했던 지난해 한미안보협의회(SCM)처럼 동맹국의 핵전략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군 당국이 북한의 핵전략을 이해하고 있을까. ICBM이라는 단어가 국방백서에 처음 등장하고 미국의 X밴드 레이더가 가동되는 등 북한 핵위협이 갈수록 구체화되는 현실에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상’을 외면할 수 있는 호사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군은 명심해야 한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