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정치·무리에 머물면 희망 없어 보수주의 원조 격인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정치가란 그 시대의 피조물이고 상황이 낳은 자식”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러시아 작가 레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초고에서 “역사적 인물이란 현재의 사건과 그보다 앞선 사건의 연관이 낳은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 정리했다.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 아니면 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라는 질문에 두 사람은 후자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정치인은 시대적 상황의 산물이고 정치적 사건은 정치적 반작용의 결과라는 의미가 된다.
두 사람의 통찰에 부합하는 정치인을 한국에서 찾아보면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YS)이다.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던 YS가 어느 날 안면을 싹 바꾸고 1990년 1월 군부 출신이 주류인 민정당, 공화당과 3당 합당을 했다. 디즈레일리와 톨스토이의 논법에 대입하자면, 이는 합당 2년 전 총선에서 민정당이 의석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여소야대가 만들어진 데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이 2당이 되고 YS가 당수인 통일민주당이 3당이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원내 3당의 당수인 YS는 DJ에게 지는 게 죽는 것보다 싫었고, 게다가 유리한 대선 경쟁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4당 체제를 깨야 된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보수정당 민자당의 탄생은 시대 상황과 사건의 연관이 이어지고 등장 인물들의 욕망이 맞물리면서 빚어진 피조물이었다.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 |
보수의 위기 속에서 깃발을 올린 개혁보수신당(가칭)이 친박세력의 헛발질로 국민적 지지와 대의명분은 잡고 있지만 처지는 고단하기 짝이 없다. 정치는 숫자로 하는 것인데 26년 전의 YS에 비하면 보수신당은 백척간두에 선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의원 숫자는 218석 대 29석, 규모에서 백칸 한옥과 단칸 판자집의 차이를 훨씬 넘는다. 삼국지에 비유하면 곡식 한 톨 없는 척박한 험지에 겨우 터를 잡은 유비의 신세라고나 할까. 내년 1월 추가 탈당이 이어지면 4당의 꼬리표를 떼고 3당으로 등급이 오르겠지만 3당이든 4당이든 숫자의 측면에선 도긴개긴이다.
미약한 세력의 결점을 메울 수 있는 것은 결국 정책과 사람이다. 진짜 보수를 하겠다면 보수주의의 맥과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 보수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안보, 역사와 전통 지키기, 질서와 연계된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 사회 통합과 공동체 보존에 주력한다. 이 점에서 따뜻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신당의 지향성은 보수주의 정신에 부합한다. 다만 신당이 경제정의 실현을 위한 개혁적 보수를 지향하고 있어 “진짜 보수 맞아?” 하는 비판론이 있다.
고장 나지 않았으면 고치지 말아야 하는 게 보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고장이 나도 많이 난 상태다. 소득 분배의 심각한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과 사회적 약자의 보호 책무는 보수의 가치가 명백하다. 공동체의 번영과 존속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할 것은 변화 그 자체가 우상이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정책이 아무리 좋아도 손님이 모이지 않으면 헛수고다. 손님을 모으려면 널리 알려진 이름, 출중한 이력, 명곡을 불러대는 불멸의 솜씨, 상황을 돌파하는 동물적 정치감각, 넓은 바다와 같은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이 다섯 가운데 세 개는 가져야 천하를 다툴 수 있다.
신당의 실질적 설계자는 유승민 의원이다. 박 대통령의 대척점에 서다 보니 정치적 흐름이 유 의원 중심으로 모아졌다. 유 의원은 정연한 논리와 해박한 지식에서 국회의원 중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다. 박 대통령의 정치탄압을 두 차례나 묵묵히 이겨낸 맷집에서 대형정치인의 자질을 찾아볼 수 있다. 유 의원은 다섯 개의 정치지도자 덕목 가운데 솜씨와 이력은 그런대로 수준급이다. 그러나 두 개로는 대선가도를 완주할 수 없다. 이름을 더 알리거나 정치감각, 혹은 넓은 가슴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럴 때 보수신당은 대선정국에서 우익을 담당할 수 있고 설령 후보가 실패하더라도 당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불사르겠다고 최근 출사표를 던졌다. 반 총장의 내년 초 귀국 이후 거취를 두고 ‘제3지대 연대론’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난무하고 있다. 반 총장은 국제 선진 사회의 좋은 정치 현장을 두루 살펴 본 국제신사다. 그런 이력을 가졌는데도 좌고우면하며 간이나 보고 낡은 무리들과 이합집산해서야 이름값을 못한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진정 나라를 구하려면 새정치를 추구해야 하고 나라를 바르게 이끌 정책 경쟁에 집중해야 한다. 이 점에서 보수신당과 반 총장의 정치적 운명은 같은 길 위에 있다.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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