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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김OO 의원 전화 아닙니다"… '문자 폭탄' 불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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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21 19:29:37 수정 : 2016-12-22 10:5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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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촛불민심' 엄한 곳에 불똥… 국회의원 번호로 오인 욕설 세례 / 부정확한 정보 유통… 부작용 속출 / 최씨 연루자 이름·발언 등 기록한 부역자 인명사전 온라인서 등장 / 분노한 시민들 미검증 정보 올려 / 사생활 침해·명예훼손 우려 높아
수원에 사는 조모(23·여)씨는 이달 초 하루 수백∼수천 통의 ‘문자 폭탄’ 세례를 받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탄핵안 가결을 촉구한다’는 비교적 점잖은 내용에서부터 욕설이 난무하는 문자메시지까지 다양했다. 자신의 전화번호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전화번호로 잘못 알려지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조씨는 결국 2년 넘게 사용한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바꿔야만 했다. 그는 “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악의 또는 장난으로 내 전화번호를 의원 번호인 것처럼 올린 것 같다”며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쌓인 것은 이해되지만 애꿎은 비난을 받게 되니 속상했다”고 털어놓았다.

박근혜·최순실 부역자 인명사전 대문 캡처 사진.
출처=박근혜게이트닷컴
비선실세 최순실(60·구속기소)씨 국정농단 사태의 불똥이 엉뚱한 사람에게로 튀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촛불집회 참여나 전화·문자 항의 등 분노한 시민들의 직접행동이 증가한 가운데 일부 부정확한 정보가 유통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정치 스타트업 ‘와글’은 지난달 초부터 온라인에서 최순실 게이트 연루자의 이름과 주요행적, 발언, 경력 등을 기록하는 ‘박근혜·최순실 부역자 인명사전’. ‘박근혜 퀸메이커 인명사전’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시민 누구나 참여해 기록할 수 있는 인명사전에는 21일 오후 현재 322명의 명단이 등재돼 있다. 각각의 명단 기록에 최소 23명이 참여했는데,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에는 300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누구나 자유롭게 내용을 편집할 수 있어 참여도가 높지만 반대로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섞일 우려도 적지 않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박 대통령 정책에 옹호적인 칼럼 4∼5개를 기고했다는 이유로 한때 부역자 인명사전에 등재됐다. 논란이 됐던 송 교수의 칼럼에는 “박 대통령의 결기는 아버지를 꼭 닮았다.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장부 스타일이다” 같은 내용도 있지만, “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을 안긴 야심작 햇볕정책을 한순간에 끝장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신뢰외교와 통일대박 드레스덴선언 같은 기본 원칙이 무너진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등 우려와 비판의 시각도 동시에 있었다. 게다가 송 교수는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꾸준히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교수 사회의 시국참여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애꿎게 ‘부역자’ 낙인이 찍혔던 셈이다.

송 교수는 “그동안 언론에 기고한 칼럼이 300개가 넘는데 현 정권을 일부나마 옹호하는 글은 5개도 되지 않는다”며 “억울한 마음에 삭제를 요청해 명단에서 제외됐지만 삭제 요청한 기록이 남았다”고 토로했다.

2012년 경기 수원에서 20대 여성을 살해한 오원춘, 2008년 붙잡힌 안산의 아동 성폭행범 조두순 등 현재 수감 중인 흉악범들도 인명사전에 줄줄이 이름을 올렸다. 심지어 34년 전 발생한 총기 난사사건의 범인 우범곤 순경도 명단에 포함돼 있다. ‘악인’ 이미지가 각인된 인물들을 마구잡이로 등재하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연결고리를 파헤쳐 보자는 원래 취지를 흐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아무리 의로운 일을 한다고 해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며 “정보사회에서의 사생활 침해를 넘어서 명예훼손이나 인권침해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정보 유통자가 스스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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