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인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의사라는 직업과 글쓰기를 병행했던 체호프의 환경이 잘 반영됐다. 중심 화자 ‘니꼴라이 스쩨빠노비치’는 의과대학 명예교수. 병리학자로 평생을 살아오며 국내외에서 무수한 훈장을 받았으며 교수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3등문관 자리까지 올랐다. 러시아에서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이름을 알고 있고 해외 강단에도 널리 이름을 날렸다. 학자적 명성에는 단 하나의 오점도 남기지 않았고 그 무엇으로도 그의 이름을 비난할 건더기가 없는, 참 대단한 명성을 확보한 노인이다.
의사라는 직업을 병행하면서 냉철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본 러시아 문호 안톤 체호프. 이번에 국내에 초역된 중편 ‘지루한 이야기’에는 삶을 바라보는 어떠한 희망도 배제돼 있다. |
“나의 내면에서는 노예에게나 걸맞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어. 머릿속에서는 밤이고 낮이고 사악한 생각들이 요동을 치고 영혼 안에는 이전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둥지를 틀고 있지. 요컨대 나는 증오하고, 경멸하고, 짜증내고,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나는 극도로 엄격하고 까다롭고 짜증스럽고 야비하고 의심 많은 인간이 되었어.”
노인이 의지할 만한 곳은 딱 한 사람. 동료 의사가 일찍이 죽으면서 맡긴 ‘까쨔’라는 딸 같은 여성이다. 세상 모든 것을 한없이 신뢰하는 표정으로 귀엽게 성장한 이 여인은 연극에 미쳐 몇 년 집 밖을 떠돌다가 사생아를 낳은 뒤 돌아와 폐인처럼 산다. 유일한 말벗인 그녀가 노인의 건강을 강력하게 걱정하지만, 노인은 못 들은 체한다. 이 노인에게 과거나 현재나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과학에 대한 애정인데, 종국에는 그것마저도 덧없어진다.
“과학에 대한 나의 애착, 더 살고 싶다는 나의 소망, 낯선 침대에 앉아 스스로를 알려고 하는 시도, 이 모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내가 삼라만상과 관련하여 정립하는 개념들에는 모든 것을 하나의 전체로 엮어주는 공통적인 무언가가 빠져 있다. … 만일 그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노인은 삶을 총체적으로 이어주는 공통의 그 무엇을 애써 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동안 쌓아온 신념과 세계관조차 무의미해진다. 그는 선언한다. “나는 패배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냥 퍼질러앉아 조용히 뭐가 오든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도저한 허무에 빠진 이 노인, 까쨔라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인이 삶에 대한 지침을 간절히 원하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다. 노인의 ‘사랑스러운 보석’인 그녀마저 등을 돌리고 떠나간다.
이것이 전부다. 어떠한 극적인 사건이나 흥미를 자극할 만한 요소는 없다. 체호프는 의사의 냉철한 시선으로 삶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하는 소설의 기본을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수행한 셈이다.
이 작품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 석영중 고려대 노문학과 교수는 “체호프는 낙관과 염세 사이, 웃음과 눈물 사이, 의미와 무의미 사이, 진지함과 시시한 것 사이의 경계선에 놓인 우리 대부분의 삶을 객관적이고 냉정한 의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면서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작가가 아니라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을 뿐”이라고 보았다. 이번에 출간된 체호프 중단편선에는 잘 알려진 ‘검은 옷의 수도사’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도 함께 수록됐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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