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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무희’ 최승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3〉 가족 사랑에 무용할 수 있는 곳 찾아 북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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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친일, 예술로 속죄”… ‘코리안 발레 창건’ 꿈 끝내 좌절 최승희가 중국에서 귀국한 날짜는 1946년 5월 29일이었다. 이렇게 귀국일이 늦어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아들 병건 출산을 앞두고 있던 것이 가장 컸다. 중국 톈진(天津)에서 출발한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서였다. 배는 미 군정청에서 제공한 미군용 수송선 LST였다.

당시 최승희는 중국 당국의 제한에도 무용 장비나 의상, 소도구 등을 최대한 챙겨왔다. 최승희는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여건이 허락하면 바로 무용을 재개할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이다. 최승희는 인천항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롭게 무용을 할 수 있으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한 기자에게 그 마음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제야말로 조선인에게 조선춤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1946년 여름 월북한 최승희에게 김일성이 무용연구소로 쓰도록 내어준 건물은 대동강변의 동일관으로 지금의 옥류관 자리에 있었다. 그해 9월 7일 이 건물에는 ‘최승희무용연구소’ 간판이 내걸렸다.
하지만 최승희는 중국에서 싸들고 온 짐을 남한에서 제대로 풀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 조짐은 최승희의 귀국 기자회견 자리에서부터 나타났다. 기자들이 최승희에게 “따라갈 거냐”는 질문을 했다. 남편 안막을 ‘따라서’ 북한으로 갈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안막은 중국 연안에 있던 항일독립운동 동지들과 함께 걸어서 1945년 12월 초순에 이미 평양으로 들어간 뒤였다. 최승희의 대답은 “나는 그런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최승희는 남편과 달리 남한으로 돌아온 이유로 “서울은 내 고향이다. 내가 예술을 할 장소로는 서울밖에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기초 동작을 익히는 연습생들의 모습이다.
최승희를 향해 문제의 친일 관련 질문도 그 기자회견 자리에서 나왔다. “어쨌든 친일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고,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 것이냐”는 요지였다. 최승희는 친일 사실을 인정했다. “내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결과가 친일을 한 것이다. 내가 예술로 친일을 했다면 예술로 속죄를 해야 하지 않느냐. 앞으로는 최승희 무용을 지양하고, 코리안 발레를 창건하는 운동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 발언 중 ‘코리안 발레’란 말이 예상치 못한 오해를 불렀다. 최승희가 말한 본래 뜻은 그때까지는 자신을 위해 혼자 하는 예술을 했지만, 앞으로는 많은 무용인을 양성해 한국적 집단 무용극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발레는 곧 서양 무용이라고 받아들인 기자들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춤을 추더니 미국이 들어오니 서양 춤을 추겠다고 한다”는 비난 기사를 쏟아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반민특위에 회부해 친일파 최승희를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다.

최승희와 아들 병건. 최승희는 중국에서 출산한 젖먹이 아들 병건을 서울에 두고 월북한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북한에서 살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예상 밖의 남한 분위기에 최승희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래도 최승희는 남한에서 활동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귀국 직후 미 군정 사령관 하지 주장, 이승만 박사 등을 만나 도움을 청했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최승희가 만난 어떤 실력자들로부터도 원하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

이 즈음에 남편 안막이 서울로 잠입한다. 최승희를 비롯해 가족을 데리러 온 것이다. 당시 최승희는 친일파라는 비난과 더불어 월북자 가족이란 이유로 우익단체로부터 목숨까지 위협받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런 숨 막히는 현실을 벗어날 탈출구가 절실하던 차에 남편이 나타난 것이다. 남편이 전하는 북한의 상황을 듣고 무용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 현지 실정을 한번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최승희는 처음에는 북한에서 살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1946년 3월쯤에 중국에서 출산한 젖먹이 아들 병건, 숙명여중에 다니던 딸 승자를 서울에 두고 간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럴 만큼 남북한을 구분하는 인식이 희미했고, 언제든 오갈 수 있는 곳으로 여기던 때였다. 월북을 고민하고 있을 때 이를 간곡히 만류하는 이승만의 조언이 담긴 편지 한 통이 최승희에게 전달되었다. 같은 이시이 바쿠 문하생이었던 조택원으로부터 월북 계획을 전해 듣고서였다.

최승희가 1946년 평양에서 문을 연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제1기 졸업생들.
“최승희 선생, 북으로 떠나시다니요. 남과 북의 이념과 풍토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그것이 선생의 예술에 얼마나 높은 장벽이 될지 선생은 모르십니다. 공산주의는 순수 예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짓과 위선으로 예술인들을 포섭하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정권을 얻은 뒤에는 그 모든 것이 끝나게 됩니다. 북에 가겠다는 결심은 부디 내려놓으시고 서울에 남아서 빛나는 건국 대열에 함께 하시기를 정중히 청합니다.”

붓글씨로 정갈하게 쓴 정중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무용 활동을 돕겠다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최승희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6년 7월 20일, 최승희는 자신의 운명을 가르는 북행길에 나선다. 남편 안막을 따라나선 최승희는 검정 치마에 긴 저고리를 입어 마치 이웃집 나들이라도 다녀오는 옷차림이었다.

남편이 구한 8t 발동선을 타고서였다. 그날 한밤중에 마포나루를 출발한 이 배에는 모두 13명이 동승했다. 최승희 부부 외에 안막의 동생 안제승과 무용가 김백봉 부부, 김시학, 이원조 등이 그들이었다. 최승희 일행을 태운 배는 인천 앞바다를 거쳐 북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항해는 최승희의 앞날을 예고하는 것처럼 험난했다. “스승 최승희 없이는 무용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 한 배를 탔던 김백봉은 그날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심청이 물에 빠졌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인당수 주변 바다를 지날 때였다. 파도가 얼마나 센지 무서워서 더 이상 배를 타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가까운 뭍에 배를 대고 하룻밤을 지새기도 했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최승희 일행이 닻을 내린 곳은 황해도 진남포항이었다. 평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하는 항구였다. 소련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가 제공하는 지프를 타고 최승희 일행은 평양에 도착했다. 이내 김일성과 집무실에서 면담을 하게 됐다. 최승희를 보자마자 김일성은 대뜸 “살러 왔느냐? 다니러 왔느냐?”고 물었다. 당시 김일성은 역량 있는 학자나 예술가들이 북한에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제 발로 찾아온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한 것이다.

최승희의 입에서 엉겁결에 “살러 왔다”는 대답이 튀어 나왔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잠시 다니러 왔던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다. 이 한마디로 최승희의 ‘월북’은 결정되고 말았다.

김일성은 “살러 왔다면 준비를 해야 되갔군”이라면서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김일성은 잠시 동안 전화기가 여러 대 놓여 있는 책상 위에 걸터 앉거나 서성이곤 했다. 그 자리에서 “살러 왔다”는 최승희를 위해 여러 가지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등의 ‘교시’를 내렸다. 최승희는 귀국 후 ‘민주일보’의 한 기자에게 자신의 포부와 계획을 밝힌 적이 있었다.

“해방된 조선의 예술가들이나 나는 우리 민족예술전통을 계승하고 우수한 외국예술문화를 섭취하여 참으로 찬란한 민족형식을 통한 조선예술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 이런 말도 남겼다. “구체적인 문제로서 무용학교, 무용박물관, 무용극장, 무용가의 문화적 향상과 국가적인 원조, 국제무용예술과의 교류 등 급속히 구체화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기사는 평양으로 떠난 다음날인 7월 21일자에 게재돼 허공 속의 메아리로 흩어져 버렸다. 분명한 것은 이런 최승희의 간절한 바람을 김일성은 단번에 들어준 셈이었다. 당시 김일성이 최승희에게 무용연구소로 쓰도록 내어준 건물이 대동강변의 동일관이었다. 일제 때 이름난 큰 요정으로, 요즘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 자리에 있었다. 동일관에 ‘최승희무용연구소’ 현판을 내걸고 개소식을 한 것은 1946년 9월 7일이었다. 이 자리에는 김일성도 참석했다. 이 연구소는 초창기에 연구생 정원 30명에 3년제로 운영되었다. 연구소 1층은 숙소, 2층은 사무실, 3층은 연습실로 사용했다.

최승희의 가족사랑은 참으로 지극해 어떤 경우에도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넘어 남편 안막은 최승희의 무용 활동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했다. 최승희의 월북 한 달여 뒤인 8월 22일 딸 안승자도 평양에 도착해 부모 품으로 돌아온다. 그해 안막은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에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약칭 문예총)’ 부위원장으로 승진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최승희의 앞길은 탄탄대로인 듯했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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