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고지도 중 가장 크고 정확한 것으로 평가 받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위인 김정호의 삶이 스크린에 되살아났다. 대동여지도가 아닌 김정호의 삶에 대해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양반이 아닌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그에 대한 정확한 기록도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다 모아봐야 A4용지 1장 정도밖엔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던 강우석 감독의 뚝심이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제작 시네마서비스, 제공/배급 CJ엔터테인먼트)를 탄생시켰다.
‘투캅스’ ‘실미도’ ‘공공의 적’ 등을 연출한 강우석 감독의 스무 번째 작품. 사계절 대한민국 최고의 절경을 카메라에 담아내느라 촬영 기간만 9개월. 그는 왜 고산자의 이야기를 꺼내들었을까.
실제 지형과 지리에 가장 근접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조선팔도 전국 방방곡곡 안 누빈 곳이 없는 김정호는 부나 명예가 아닌, 백성들이 잘못된 지도로 죽거나 고생하는 일 없이 잘 살게 도와주고자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동여지도를 누구나 소유할 수 있도록 목판 인쇄 방식으로 만들었는가 하면, 접어서 들고 다닐 수 있게 ‘분첩절첩식’으로 만들어 휴대성을 높인 점이 영화에 부각된다.
원작자 박범신 작가는 이를 두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꿈꿨던 사람”이라고 칭했을 정도. 고산자 김정호의 애민정신, 그리고 오직 한 길(지도)을 향한 누구보다 뜨거웠던 집념과 열정이 스크린에 오롯이 담겼다.
영화는 대동여지도 초간본이 나오고 몇 해가 흐른 시점, 완벽한 지도를 완성시키기 위한 김정호(차승원 분)의 노력을 그린다. 백두산부터 마라도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훌쩍 커버린 여식 순실(남지현 분)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하는 대목은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히 지도를 만드는 ‘지도쟁이’를 주인공으로 했지만, 여느 작품과 다를 바 없이 이 영화에서도 뚜렷한 갈등구조는 등장한다. 권력을 위해 지도를 독점하던 시대, 흥선대원군(유준상 분)이나 안동 김씨 가문 등 권력자들의 유혹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김정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김정호의 삶에 대한 사료가 부족한 탓에 상당부분 허구(픽션)을 가미해야 했는데 관객들을 납득시키는 과정이 결코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식민사관이나 역사왜곡에 대한 우려가 없지는 않지만 좀 더 유연한 시각과 사고로 영화를 바라봐도 좋을 것 같다.
김정호의 삶을 무던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가슴 속 뜨거운 무언가와 만날 수 있다. 혹자들은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나 실없는 유머에 ‘세련되지 못하다’고 평할 수도 있지만 ‘전체관람가’ 등급임을 감안해서 본다면 전세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한 감독의 취사선택과 완급조절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사극이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에 여러 접점들을 시도하며 때론 웃음을, 때론 감동을 유발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던가. 그러나 분명 이는 관객에 따라 호오가 갈릴 수도 있는 부분.
백두산 천지, 합천 황매산, 북한강, 여수 여자만, 마라도 등 CG가 아닌 진짜 절경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고산자가 마지막으로 지도에 새겨 넣으려 했던 곳은 어디였을지 그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는 묘미 또한 쏠쏠하다.
인생연기를 펼쳤다는 소문이 돌더니, 배우 차승원은 흠 잡을 데 없는 사극 연기로 매 장면 감탄을 자아낸다. 충무로 대표 신스틸러 김인권의 깊이 있는 감초연기, 또 다른 이야기 축을 형성한 두 여배우 신동미와 남지현의 열연에 기대를 걸어도 좋다. 전체관람가. 129분. 9월7일 개봉.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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