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로 세계적인 문명을 날렸던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72)는 이 플롯에 ‘계단 위의 여자’(시공사)를 채워 넣었다. 소설가 배수아가 번역한 이 장편은 용감하게 사랑하지 못한 이들의 회한을 부추기는 탄식의 서사처럼 읽힌다.
‘책 읽어주는 남자’로 세계적인 문명을 날린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 그는 6년 만에 펴낸 신작 ‘계단 위의 여자’에서 그림을 모티프로 늙지 않을 사랑을 모색했다. 시공사 제공 |
“젊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리라는 느낌이에요. 틀어지고 어긋나버린 모든 것이, 우리가 놓쳐버린 모든 것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잘못이. 더 이상 그런 감정이 없다면, 한 번 일어나버린 일과 한 번 경험한 일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면, 그러면 우리는 늙은 거예요.”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트로피’로 생각하는 사업가 남편과, 자신을 영감의 원천인 ‘뮤즈’로만 이용한 화가와, 마치 ‘기사’처럼 나타나 공주를 구원하는 캐릭터로 착각하는 ‘나’를 포함한 남자들에게서 떠나 목숨을 건 사랑을 갈구했던 이레네는 테러리스트를 거쳐 동독에 은거했다가 통독 이후 인생 후반은 호주의 한 섬으로 탈출해 소외된 아이들을 돌보며 생을 소진해왔다. 그네는 섬에 마지막까지 남은 나에게 “한 여인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재발견”하려면 더 나이를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3부에 걸쳐 짧은 장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이 소설은 산문시처럼 읽힌다. 긴박감 넘치는 서사가 아니라 늙어서 다시 만난 남녀의 관념적인 대사로 이어져 지루하게 전개될 수 있는 단점을 스타카토 산문으로 이어내는 기지를 발휘한 셈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누구나 삶의 어느 시절을 스쳐간 이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젊든 늙든 과거형 사랑은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복원해 수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젊음의 관건이라니, 이 기준을 따르자면 젊어서 이미 늙어버린 이도 있고 늙어서도 여전히 가능성이 남은 이도 있을 수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에마, 계단 위의 나체’라는 그림을 모티프로 삼았지만 실제 화가와 작중 화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 늙은 이레네는 그 시절 그네처럼 나신으로 계단을 내려온다. “생의 바로 이 순간, 그녀는 사랑 이외에는 줄 것이 없으며, 나 또한 그러하도록 초대하고 싶다고.” 사십년이 흘러 죽어가는 그네의 몸을 계단 아래에서 처음으로 안은 ‘나’는 “지친 아름다움이라도 역시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인 것을… 그녀는 용감하게 삶을 살아왔고 나는 겁내면서 살아왔다”고 에필로그에서 되뇌인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늙은 사랑의 노래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 아닐까.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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