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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의 문자로 보는 세상] ⑭ 운명과 숙명 그리고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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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7-15 20:38:24 수정 : 2016-07-15 20: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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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 운명이 곧 숙명… 행운은 도전하는 사람에 미소 지어 일전에 천하제일 광개토부대장의 초대로 그야말로 군인들과 함께 만찬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뜻밖의 건배사 제의를 받았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글자가 있었으니, 바로 ‘군사 군(軍)’ 자가 들어있는 ‘움직일 운(運)’ 자에 느낌이 왔다. 건배사는 다음과 같다.

“행운(幸運)이라고 할 때의 운(運) 자는 본래 ‘움직임’의 뜻이었으나, 움직이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또 그에게 ‘행운’이 오기 때문에 나중에 ‘행운’의 뜻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운(運, luck)은 운(運, movement)에서 온다.’ 곧, ‘행운은 움직임에서 온다’라는 격언이 성립됩니다. 놀랍게도 운(運) 자 안에는 움직이는 방법까지 제시되어 있습니다. 곧, 군인(軍人)처럼 움직여야 합니다. 제가 선창으로 ‘군인처럼!’ 하면, 여러분은 ‘움직이자!’라고 힘차게 답하시면 되겠습니다.”

“군인처럼!” “움직이자!”

군(軍)은 본래 주(周)나라 때의 병사제도로서, 5개 사(師)를 합친 1만2500명의 병력을 말하며, 천자(天子)의 경우 6군(軍)을 두었다. 그리고 ‘군사 군(軍, jūn)’ 자는 ‘임금 군(君, jūn)’과 음이 같다. 이는 군(軍)은 군(君)을 위해 존재했기 때문이다. 군(軍) 자의 전서 모습은 군사들이 임금(君)을 태운 수레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싸다’는 뜻의 포(勹)가 멱(冖)으로 바뀌었다.

근년의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목함 지뢰 사건 등에서 보듯이 군인의 운명(運命)은 언제나 생사의 갈림길에 노출되어 있다. 전사한 군인은 숙명(宿命)이려니 하고 나라에서 장례를 치르지만, 그나마 살아남은 군인은 행운(幸運)이라고나 할까.

여기에서 운명(運命)과 숙명(宿命) 그리고 행운(幸運)에 대한 문자학적 접근을 해 보고자 한다. 제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고 소프트 파워가 대세인 지금에도 운명과 숙명 그리고 행운은 여전히 존재한다.

‘운명에 맡긴다’거나 ‘숙명의 대결을 펼친다’ 등의 용례를 보면 운명과 숙명의 사전적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단지 숙명의 어감이 더 강하게 느껴질 뿐이다.

운명, 숙명이라 할 때의 명(命) 자는 신하가 임금에게, 하인이 주인에게 목숨을 구하기 위해 꿇어앉아 있는 모습에서 ‘목숨 명(命)’의 뜻이 나온다. 따라서 운명이나 숙명은 목숨과 관련될 만큼 중요한 순간에 사용하는 말이므로 함부로 말해서는 곤란하다.

운명과 숙명에 대한 가장 명쾌한 구분은 구름처럼 왔다 간 영원한 선객(禪客) 지허스님의 ‘선방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운명과 숙명은 다르다. 아직 삶을 확정 짓지 않은 우리 인생은 현실태(現實態)이자 가능태(可能態)이며, 숙명의 소산(所産)이 아니라 운명의 소조(所造)다.”

다소 어려운 이 문장은 인생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인생이란 현실 그대로의 몸짓이자 가능성을 지향하는 몸짓으로 볼 수 있으며, 인생은 숙명이 아니라 운명이 만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숙명은 자기 이전에 던져진 의지이자 주어진 질서여서, 생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것이지만, 운명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자유로이 선택한 후천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숙명은 필연이지만 운명은 당위요, 숙명이 불변이라면 운명은 가변이요, 숙명이 한계성이라면 운명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현재의 나는 숙명의 객체이지만 운명의 주체이다. 숙명은 자기 부재의 과거가 관장했지만, 운명은 자기 실재의 현재가 그리고 자신이 관장하는 것이어서, 운명을 창조하고 개조할 수 있는 소지는 운명(殞命) 직전까지 무한히 열려 있다.

숙명의 필연성을 인식하면 운명의 당위성을 절감하게 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숙명적인 것을 피하려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며, 운명적인 것은 붙잡고 사랑해야 할 뿐이다.”

위의 내용은 헷갈리기 쉬운 운명과 숙명을 절묘한 대비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지허스님의 일기에 의하면 운명은 나의 선택이나 숙명은 나 이전의 필수이고, 운명은 후천적이나 숙명은 선천적이며, 운명은 가능성이고 숙명은 한계성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운명은 그 가능성 때문에 주목하게 되지만 숙명은 그 한계성 때문에 피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운명이라고 꼭 다행한 것도 아니고 숙명이라고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운명은 운명의 주체인 나 스스로 움직이며 피할 수 있지만, 숙명은 숙명의 객체인 내가 피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운명은 ‘움직일 운(運)’ 자가 일러주듯이 앞에서 날아오는 돌을 보고 피할 수 있지만, 숙명은 ‘묵을 숙(宿)’ 자가 보여주듯이 잠잘 때 날아오는 돌과 같아서 피할 수 없다.

지허스님의 일기에는 다음의 내용도 있다.

“선객은 모름지기 ‘삼부족(三不足)’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식부족(食不足), 의부족(衣不足), 수부족(睡不足)이 바로 그것이다.”

삼부족을 숙명이 아닌 운명으로 본 것은 첫째는 피할 수 있는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부족함으로써 채울 수 있는 다른 것, 곧 성불(成佛)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운 중에 최고 운은 행운(幸運)이다. 행운은 떠가는 구름 곧, 행운(行雲)처럼 자신도 모르게 다가오고 또 지나간다. 요는 행운은 우두망찰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행운의 여신은 부지런히 생각하고 행동하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미소를 짓는다는 말씀이다. 학창 시절 친구의 책상에 붙어 있던 다음 경구는 잊을 수 없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행운(幸運)의 ‘다행 행(幸)’ 자가 ‘매울 신(辛)’ 자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갖은 고생을 뜻하는 신고(辛苦)를 겪어야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행복은 또 행복(行福)해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행복(行福)이란 복을 지음으로써 얻는 복을 말한다.

고생을 뜻하는 신(辛) 자에서 나온 글자로 ‘새 신(新)’과 ‘친할 친(親)’이 있다. 고생을 겪지 않고서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없고, 함께 고생한 사이라야 친하게 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나와 더불어 가장 큰 신고(辛苦)를 겪은 사람은 양친이다. 그래서 부모를 양친(兩親)이라 한다. 신(辛)의 진화는 계속된다.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다 겪으면 드디어 달인(達人)이 된다.

삼복(三伏)의 더위가 다가오고 있다. ‘엎드릴 복(伏)’ 자처럼 땀샘이 없는 개도 주인 앞에 엎드리며 인내하는 계절이다. 운명은 마주하고, 숙명과는 대항하며, 행운을 빈다.

권상호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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