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6년 MBC ‘일요일 일요일밤에’에서 선보였던 ‘이경규가 간다-숨은 양심을 찾아서’를 기억하는가? 한밤중 정지선을 지킨 운전자에게 ‘양심 냉장고’를 선물하는 내용으로 방송 당시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코너였다.
그때 시청자라면 양심 냉장고 첫 번째 주인공으로 선정된 장애인 남성을 기억할 것이다. 늦은 밤 아무도 건너지 않는 횡단보도 정지선을 지킨 데다가 보행자용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나서야 차를 출발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정말로 양심을 지켰던 그를 말이다.
주인공 이종익 씨는 정지선을 늘 지킨다고 말했다. 나중에 그는 한국고용정보원이 운영하는 한 사이트의 모델로도 활동했는데, 안타깝게도 폐암 때문에 작년 2월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심 냉장고가 지핀 ‘정지선 지키기’ 불씨는 전국으로 퍼졌다. 여러 지자체가 정지선 지키기 운동을 펼쳤으며, 위반한 사람들에게 벌금까지 물리겠다고 선언했다. 정지선을 잘 지킨 운전자에게 선물을 준 곳도 있었다.
![]() |
서울 종로구의 한 왕복 8차선 도로. |
정지선 지키는 운전자가 얼마나 되는지 보고 싶었다.
그래서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대 도로를 돌며 횡단보도를 살폈다. 때마침 국민안전처에서 문자 메시지가 하나 왔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졌으니 노약자는 야외활동을 자제하고,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라는 내용이었다.
서대문에서 광화문으로 넘어가는 왕복 8차선 도로에 자리를 틀었다.
보행자용 신호등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 정지선 앞에 선 차량을 체크했다. 그리고 정지선 넘은 차량을 따로 세었다. 정지선 앞에 멈춘 30대 중 이를 지키지 않은 차량은 4대였다.
세종대로 사거리 근처 횡단보도로 이동했다. 마찬가지로 정지선 앞에 선 차량과 선 넘은 차를 따로 세었다. 총 40대가 정지선 앞에 멈춘 동안 6대가 선을 넘었다.
오토바이는 따로 체크했다. 안타깝게도 100% 정지선을 어겼다. 정지선 밟고 지나간 오토바이는 7대였다. 정지선 위반 차량 1대가 스스로 정도가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후진을 시도한 점은 흥미로웠다.
![]() |
지나가는 순간 찍은 게 아니다. 분명히 빨간 불에 멈춘 버스였다. 정지선을 깔끔하게 넘어 육중한 몸체를 횡단보도로 들이밀었다. |
보신각 앞 사거리로 향했다. 보행자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총 8차례에 걸쳐 왼쪽에 멈춰선 차량과 정지선 밟은 차를 따로 세었다.
총 29대가 횡단보도 앞에 섰고, 정지선을 밟은 차는 5대였다. 여덟 번 정지선을 지켜본 동안 위반 차량이 한 대도 없었던 경우는 5회나 됐다.
마지막으로 종로3가로 향하는 또 다른 왕복 8차선 도로에 섰다. 종각과 종로5가 양쪽에서 밀려드는 차로 도로가 빽빽했다. 경적이 쉴새 없이 울리고, 따갑게 쏟아지는 햇볕 아래 운전자들의 짜증이 거리로 밀려 나오는 환각을 일으켰다.
총 여섯 차례에 걸쳐 보행자 신호등이 바뀐 동안 ‘종각→종로5가’ 방향 횡단보도 앞에 24대가 멈췄다. 무려 12대, 50%가 정지선을 어겼다. 예상 밖의 결과물을 얻었다는 생각을 하고는 금세 쓴웃음을 지었다.
![]() |
보신각 앞 사거리. 모든 차량이 정지선을 지켰다. |
교통안전공단의 교통안전정보관리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종로구 3곳에서 오전과 오후 각각 1시간씩 정지선 준수 차량 수를 체크한 결과 58대가 정지선을 어겼다. 총 194대를 체크했으니, 약 30% 수준이었다.
세계일보 체크 결과(123대 중 27대·약 21%)와 차이는 있었지만 교통량이나 측정 시간 등의 변수를 고려하면 비슷한 수준이었다.
취재를 준비하면서 교통안전공단에 “정지선 준수 여부를 살펴봤던 장소를 알 수 있느냐”고 물었다. 홈페이지에는 단지 1, 2, 3으로만 체크 장소를 밝혔기 때문이다.
“말하기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언제, 어디서 정지선 준수 차량을 세는지 안다면 지자체의 자발적 단속으로 인위적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 답에 씁쓸함을 느낀 건 기자뿐만은 아니리라. 문득 전국의 수많은 '정지선' 씨는 안녕한지 묻고 싶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