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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친근한 사물들을 모티프로 집필한 단편들을 모아 소설집을 묶어낸 은희경씨. 그는 “새로운 경험이었으므로 좋아하는 걸 자유롭게 시도하고 멋도 부려보았다”고 썼다. 창비 제공 |
K는 평생 아버지가 수집해놓은 각종 위스키를 쌓아놓고 위스키 중에서도 싱글몰트만을 파는 술집을 열었다. 그가 이 술집을 운영하는 방식은 룰렛 게임과 닮았다. 한 잔에 수백만원씩 하는 비싼 위스키에서부터 대중적인 위스키까지 라벨을 가린 채 세 잔에 담아 내놓고 그중에서 손님이 선택한 위스키를 계속 서비스하는 방식이다. 술값은 어느 것을 선택하든 똑같다. 이 사람 K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그가 ‘나’를 이 집에 초청해 마지막까지 남은 두 손님과 더불어 진실게임을 벌이는 형식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취한 네 사람은 분명 운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단지 조금 운이 없을 뿐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단지 조금 불행한 것처럼, 그래서 단지 약간의 행운이 더 필요할 뿐인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불운의 총량은 어차피 수정될 수 없는 것이니까.”
동의하는가. 끝부분의 한 대목을 발설해버려서 스포일러의 혐의를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은희경 소설이 대개 그러하듯이 줄거리로만 요약할 수 없는 행간의 숨은 그림들은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말미에 배치한 ‘정화된 밤’도 같은 맥락에서 쇤베르그가 낭만주의에서 무조음악으로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곡했다는 동명의 표제곡을 모티프로 인간들의 악의와 착각과 무례를 담아낸다. ‘별의 동굴’에서는 9년째 박사논문에 매달리는 쓸쓸한 사내의 시선으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재해석한다. 신과 피조물의 손가락이 닿을락말락하는 순간은 알려진 것처럼 신이 인간에게 지성을 부여하는 장면이 아니라 ‘최초의 인간이 창조되는 순간 깨달아버린 살아 있음의 무력함, 그리고 그 굴레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명령하는 엄격한 운명의 모습’이라고 본다.
은희경의 출세작 ‘새의 선물’(1995)에 등장하는 열두 살 소녀 진희의 냉소적인 시선이 이번 소설집에도 20여년 세월을 거치는 동안 발효된 위스키 향처럼 깔려 있다. 두 번째 순서로 ‘옷’을 모티프로 써내려간 ‘장미의 왕자’에서는 아예 진희의 화법으로 말한다. “투명인간이 되어 종일 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 있고 싶었던 어린 나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그런 진실하고 착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이 밖에도 ‘대용품’ ‘불연속선’ ‘별의 동굴’ 등 8년 전부터 써온 소설 6편을 한 권으로 묶어낸 이번 소설집의 단편들은 술, 옷, 신발, 가방, 책과 사진, 음악 등을 각각 모티프로 삼은 ‘표제소설’들이다. 은희경은 “친근한 사물들이 어떤 낯선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상상해보는 게 재미있었다”면서 “가장 예민하고 집중되고 절실한 상태의 작가가 눈앞의 한 순간을 포착한 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편집하고 가공하는 방식”으로 썼다고 밝혔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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