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모(42·여)씨는 지난해 11월 빚에 시달리던 끝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김씨는 “2000만원을 대출해 주겠다”는 대포통장 유통 조직원의 꼬임에 속아 신분증 사본 등을 넘겼다. 대포통장 유통조직은 김씨 명의로 2개의 ‘유령법인’을 세웠고 김씨는 수도권 일대 은행을 돌면서 일주일 만에 이 법인 명의의 통장 20개를 만들어 대포통장 유통조직에 건넸다. 이들은 해당 통장을 개당 50만∼100만원을 받고 보이스피싱 조직에 넘겼다. 대출금은커녕 대포통장을 만든 혐의로 지난달 구속기소된 김씨는 “통장 스무개를 만드는 동안 은행에선 사업자등록증과 신분증 등 기본서류만 확인했다”고 진술했다.
정부가 각종 사기 범죄의 도구로 활용되는 대포통장을 근절하려고 개인 통장 개설을 까다롭게 하자 유령법인을 통한 대포통장 개설이 잇따르고 있다. 최근 금융당국이 간단한 서류만으로도 법인통장을 만들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한 틈을 노린 것이다.
23일 경찰 등에 따르면 노숙자나 실직자 등을 꼬드겨 개인명의의 통장을 개설하던 과거와 달리 유령법인을 세워 대포통장을 만든 뒤 사기 범죄에 이용하는 사례가 잇따라 적발되고 있다.
최근 충북 청주에서는 가짜 유한회사를 설립해 대포통장 50여개를 만들어 보이스피싱 조직에 넘긴 사회복무요원 김모(24)씨 등 5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지난 4월에도 부산과 경기도에서 각각 유령법인 39개와 123개를 세운 뒤 대포통장을 수백개씩 만든 조직이 붙잡혔다.
이는 개인통장 개설은 까다로워진 반면 법인통장 개설은 수월해진 것과 무관치 않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개인이 통장을 만들려면 은행에 재직증명서나 근로계약서 등 증빙서류를 제출토록 하고 일정 기간 여러 은행에서 통장을 개설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대포통장 개설 방지책을 강화했다.
지난 4월에는 신규 창업자의 경우 세금계산서와 거래실적 등 관련 서류를 준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금융감독원이 시중 은행에 신규 법인의 통장 설립 규제를 대폭 완화하도록 지시하면서 대포통장용 법인통장 만들기가 더욱 편해졌다. 금감원 관계자는 “법인통장 개설 관련 민원이 계속돼 이뤄진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신규법인은 임대차계약서나 홈페이지, 사무실 집기영수증 등만 있으면 계좌를 개설할 수 있게 됐다. 사업장 확인이 불가능해도 1일 190만원 한도의 ‘소액거래 계좌’는 개설할 수 있다. 사실상 증빙서류가 부족해도 법인통장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려 대포통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숨통을 틔어준 셈이다.

금감원 측은 “신규법인에 대한 금감원의 규제 완화를 악용하는 조직이 등장해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이라며 “대포통장을 억제하면서도 신규 사업자의 어려움을 덜어 줄 방도를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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