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0원 vs 1000원.’ 990원, 1900원, 2900원, 9900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격표들이다. 소비자들은 대개 990원을 1000원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인식한다. 실질적인 차이는 10원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기껏해야 10원이나 100원, 200원을 깎아주고 있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이 가격에 흔들려 충동구매를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깎아준 100원이나 200원의 가치는 작다. 하지만 판매현장에서 이렇게 매긴 가격들이 이끌어내는 판매 상승효과는 크다.

한 예를 들어보자. 이마트는 ‘990원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주로 무, 호박, 깻잎, 고추 등 신선식품을 판매한다. ‘990원 코너’는 아침에 물건을 가득 채워 놓으면 저녁 무렵 제품이 동이 날 정도로 인기다. 몇해전 수산물 매장에서 오징어를 마리당 990원에 내놔 화제가 됐다.
이마트 관계자는 “1000원과 990원의 차이는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엄청나다. 없어서 못 파는 990원 짜리를 1000원에 판다고 하면 매출이 절반으로 뚝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소비자가 느끼기에 1000원과 990원의 차이는 상당하다. 앞자리가 9가 되면서 900원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10원 할인에 유혹되어 흔들리는 걸까?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매닝 박사와 워싱턴주립대 스프로트 박사가 소비자들의 이런 심리를 연구한 결과를 ‘소비자 연구 저널’이란 잡지에 발표했다.
소비자들이 가격표의 첫째 자릿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내용의 ‘왼쪽자리효과’. 2달러짜리 볼펜 A와 4달러짜리 볼펜 B를 학생들에게 우선 제시한다. 그런 후 4달러짜리 B를 3달러 99센트에 팔겠다고 한다. 이때 44%의 학생들이 B를 선택한다. 그러나 뒤이어 2달러짜리를 1달러 99센트에 팔겠다고 하자 B를 선택하겠다는 사람은 18%로 뚝 떨어졌다.
저자는 ‘왼쪽자리효과’와 관련된 또 다른 실험을 소개한다. A그룹에는 1×2×3…×8=?을, B그룹에는 8×7×6…×1=?의 문제를 제시했다. 놀랍게도 A그룹이 내놓은 평균값은 512, B그룹의 평균값은 2250였다. 곱셈의 시작이 1이냐 8이냐에 따라 예상 답이 4배 가까운 차이를 보인 것이다. 가장 앞에 놓인 숫자가 무엇이냐가 결과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보여주는지 실감할 수 있는 예다. “사람들이 대개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숫자를 접할 때에도 맨 왼쪽 자리에 집중한다. 즉 4달러짜리 펜이 3달러 99센트로 바뀌면 1센트 차이가 아니라 첫자리인 1달러의 변화로 인식해 마치 가격이 크게 떨어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소비자심리학자들은 이를 응용해 미국의 할인점에서는 1.99달러, 10.99달러와 같이 상품에 9자로 끝나는 가격들을 많이 붙인다고 한다. 1.99달러는 실은 2달러다. 그러나 앞의 숫자 1에 주목해 1달러에 가까운 가격으로 받아들이고 예상보다 많이 구매한다는 논리다.
국내에서도 최근 기업들 사이에서 ‘990원 마케팅’이 유행 처럼 번지고 있다.
‘이래도 안살래’식 마케팅으로 기업 입장에서는 큰 손해를 보지만 홍보 효과는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롯데마트는 온라인 쇼핑몰인 롯데마트몰이 다음달 8일까지 ‘메가토킹&JKOLS 전화 영어’를 판매한다. 롯데마트는 대표 상품으로 일주일간 원하는 시간에 ‘전화영어 주 3회 이용’, ‘무료 영문첨삭 서비스’, ‘전용교재 및 MP3파일’을 이용할 수 있는 ‘JKOLS 전화영어 일주일 이용권’을 990원 특가에 롯데마트몰 단독으로 선보인다.
앞서 온라인 쇼핑사이트 옥션도 파고다어학원의 외국어 강의 4개를 990원에 이용할 수 있는 ‘프리패스 이벤트’를 실시한바 있다.
990원짜리 품목도 나와 화제가 되고 있다.
커피전문프랜차이즈 ‘구공카페’는 전 매장에서 아메리카노(Americano) 커피 제품을 990원에 판매한다. 소비자들이 1000원을 내고 계산대에 놓인 통에서 10원을 자율적으로 챙겨가는 시스템이다.

옛날통닭 프랜차이즈 ‘또봉이통닭’도 5월 생일을 맞은 아빠들에게 치킨 한 마리를 990원에 판매키로해 눈길을 끌고 있다.
허경옥 성신여대 생활문화소비자학과 교수는 “저성장에 저물가까지 더해진 이른바 ‘뉴노멀(New normal)’ 시대가 국내에도 본격 도래하면서 기업들이 저성장·저물가에 적합한 사업구조 갖추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며 “가격의 거품을 걷어내는 측면도 있지만, 기업의 홍보 효과도 매우 크다”고 말했다.
김기환 유통전문기자 k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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