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왕과 선비’ 영조는 1749년 간행한 ‘탁지정례’ 앞부분에 “철권으로 남겨 영원히 따르게 하라”는 글을 남겼다. 궁궐의 각 전각에 필요한 물자를 정리한 책이었다. 궁중의 지출이 많다는 지적에 규모 있는 나라살림을 마련하기 위해 간행했다. 1783년 정조는 버려진 아이들의 구호 방법을 규정한 ‘자휼전칙’를 발간했다. 3세 이하 유기아(遺棄兒: 버려진 아이)에게는 유모를 정해 젖을 먹이고 유모에게 일정한 물품을 지급하도록 하는 등의 지침을 만들었다.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던 영·정조가 시행한 ‘애민책’(愛民策)의 일단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올해 장서각 상설전 ‘조선의 국왕과 선비’에 내놓은 전시품에는 백성을 위한 정책에 골몰했던 두 중흥군주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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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의 중흥을 이끈 영조(왼쪽), 정조는 각종 ‘애민책’을 만들어 백성을 보살폈다. 영조의 ‘정례류’와 정조의 ‘자휼전칙’ 편찬은 그 사례의 하나다. |
나라 살림을 책임졌던 호조판서 박문수는 영조에게 “궁중의 지출이 매우 많아져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영조의 생각 역시 다르지 않았다. 뜻을 같이한 두 사람은 ‘정례(定例)류’ 편찬에 힘썼다. ‘표준으로 정한 규례’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시행세칙에 해당한다.
각종 정례에는 궁궐의 각 전각과 관청들, 주요 행사 등에 필요한 물품의 수량과 종류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방만한 지출을 줄여 규모 있는 국가재정을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탁지정례는 대전, 중궁전, 세자궁·빈궁 등에서 필요한 물품의 종류를 규정하고 액수, 상납 관청, 문서 처리의 규정 등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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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정례 |
한중연 하은미 연구원은 “의례 절차에 따른 예물과 기물의 종류와 잔칫상 차림, 궁인들의 옷가지와 수량, 옷감의 종류와 분량을 일일이 명시하고 있다”며 “물품의 내역과 수량을 엄격히 규정해 쓸데없는 비용이 들지 않게 해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데 힘썼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통받는 아이들 구휼법 제시한 정조
흉년의 고통은 백성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지만 아이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의지할 곳 없이 떠돌거나 버려지는 아이들의 현실은 처참했다. 정조는 부모나 친척 등 의지할 곳을 찾을 때까지 구호하고, 자녀가 없는 사람들이 돌보게 하는 구휼법을 구체적으로 정한 자휼전칙을 만들어 국한문으로 인쇄한 뒤 전국에 반포했다.
4~10세의 행걸아(行乞兒: 빌어먹는 아이), 3세 이하의 유기아가 대상이었다. 행걸아는 진휼청에서 구호해 옷을 주고 병을 고쳐주어야 하며, 날마다 1인당 정해진 분량의 쌀·간장·미역을 지급하게 했다. 유기아에게 유모가 정해졌는데, 유모에게도 분량의 쌀이 지급됐다. 행걸아나 유기아를 기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진휼청의 허가를 받아 자녀나 노비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암행어사를 파견하며 직무를 지시한 ‘봉서’에서는 각 지역 수령을 감독하고, 백성들을 위해 실시한 정책의 집행상황을 점검하려 한 정조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경기 암행어사 봉서’는 1794년 정만석, 정약용 등을 경기지역에 암행어사로 보내며 내린 봉서다. 경기 지역의 흉년에 조정의 구휼정책이 백성에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보고를 받은 뒤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실상을 파악하려 한 것이다.
정조는 봉서에서 이런 상황의 원인을 지방관리의 폐정에서 찾으면서 암행어사가 시장과 촌락을 드나들며 세밀하게 탐문해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봉서에는 조세 감면 혜택이 “아전 등의 절취로 백성들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특별히 살피라”는 조목 등 모두 15조의 임무를 적시하고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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