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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10 선거 홍보물에는 ‘투표는 애국민의 의무’였다는 문구가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
1956년 3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의 부통령 후보자지명에 관한 담화가 발표됐다. 담화문에서 이승만은 부통령으로 공천된 이기붕이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적임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사사오입 개헌(대통령의 3선 연임 제한의 철폐를 위해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불법통과시킨 제2차 헌법개정) 등 헌정유린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높았던 터라 그의 호소는 먹히지 않았다. 이승만은 경쟁자인 신익희가 선거를 불과 열흘을 앞두고 사망하면서 어렵게 대통령이 되었지만 부통령은 야당의 장면이 당선되면서 이승만 정권에 큰 타격을 줬다. 이 선거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 민심의 이반은 결국 1960년 3·15 부정선거 때문에 폭발했고, 이승만의 하야로 이어졌다.
1978년 10대 국회의원선거는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불러온 단초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유신체제 아래서 치러진 선거였음에도 야당인 신민당, 민주통일당은 40%를 넘는 지지를 얻어 31.7%의 공화당에 앞섰다. 선거에서 패배한 공화당은 이후 YH사건(회사 폐업조치에 항의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시위를 벌이던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을 경찰이 강제 진압한 사건),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 등 무리수를 뒀고, 결국 부마항쟁을 불렀다. 혼란의 끝에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하는 ‘10·26 사건’이 있었다.
‘신민 대도시 압승 제1야당’, 1985년 12대 국회의원선거 결과를 보도한 한 신문의 제목이다. 신민당은 김영상, 김대중이 이끄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기반으로 선거일 불과 3주 전에 만들어진 정당이었다.
12대 총선 결과로 전두환 정권이 마련한 정당체계는 와해됐다. 선거 때 공약으로 내세운 ‘직선제 개헌’을 위한 신민당의 서명운동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와 결합하며 1987년 6월 항쟁으로 꽃피었다.
서울대 강원택 교수는 “민주화 이전 시기에도 유권자들의 불만은 선거를 통해 표출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4·19혁명이나 10·26사건, 6·29 선언 같은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졌다”며 “한국 정치의 거대한 변화는 선거 정치를 제외하고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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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대선에 야당이 내세운 선거구호는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대한 높아진 불만을 반영한 것이었다. |
전시물 중에 유독 많은 선거포스터, 홍보물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다 보면 선거를 즈음한 때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1948년 5·10 총선의 구호는 ‘기권은 국민의 수치, 투표는 애국민의 의무’였다. 해방 후 국회 구성, 헌법 제정, 대통령 선출을 통해 국가 체제의 틀을 만들어가는 시작이 된 선거였던 만큼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선거는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행사였으나 투표율은 무려 95.5%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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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은 1948년 5·10 총선거 당시 투표를 위해 유권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 해방 후 처음 치러진 이 선거의 투표율은 무려 95.5%를 기록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
13대 대선,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이제는 안정입니다’는 구호를 선거포스터에 내세웠다. 6월항쟁을 전후해 급격하게 분출하던 민주화 시위로 인한 혼란으로 규정해 안정 심리를 자극할 요량이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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