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암울했던 1970∼80년대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40대 중반 이상의 연령층에게 ‘단식투쟁’이란 그다지 생소한 단어가 아니다.
지구 반대편 아일랜드의 현대사에도 우리의 ‘80년 광주’와 같은 아픔이 남아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헝거’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영국에 저항했던 IRA(아일랜드공화국군)의 주요 인물 보비 샌즈(마이클 패스벤더)와 그의 동료들이 교도소의 폭압을 견뎌내면서 자신들의 신념을 끝내 꺾지 않는 모습을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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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자유가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영화 ‘헝거’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몸’이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
보비 샌즈는 영국공수부대의 실탄 발사에도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14년형을 선고 받고,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메이즈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아일랜드 독립과 IRA 조직원들의 정치범 대우를 요구하며 죄수복 입기를 거부하는 등 투쟁을 벌이지만 대처 총리는 “정치적 폭력은 존재하지 않고, 형사적 폭력만이 존재한다”며 “영국 정부는 그들에게 정치범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연설을 통해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이에, 보비 샌즈는 1981년 3월 1일부터 75명의 동료들과 함께 2주 간격으로 릴레이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이 기간 동안 영국 총선거에 옥중 출마해 최연소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지만 영국은 법을 바꾸어 가면서까지 무효화시킨다. 결국 보비 샌즈는 “한 마리의 종달새를 가둘 수는 있지만 그 노래까지 멈추게 할 수는 없다”는 글을 남긴 채 단식 66일 만에 숨졌다. 그의 나이는 불과 27세였다.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그를 애도했고, 지금도 그는 아일랜드의 국민영웅으로 남아 있다.
스티브 매퀸 감독은 자유가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카메라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몸’을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변모시켜 가는 과정을 섬세하면서도 차분하게 따라간다.

보비 샌즈의 신념과 의지는 확고하다. “리더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옳다고 믿는 것에 제 목숨을 걸 겁니다”, “내가 실패해도, 다음 세대는 더욱 굳은 결의로 투쟁할 거예요”라는 그의 대사는 그동안 먹고살기에 바빴던 우리에게 정작 잊고 사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감독은 오물로 뒤덮인 감방이나 수감자들을 가격한 간수의 피 묻은 주먹 등을 감각적으로 보여 준다. 또 영화를 통해 ‘보비 샌즈의 선택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자유를 위한 저항은 어리석은 짓인가, 위대한 행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선악 구분을 배제한 채,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이러한 연출은 16분간의 롱테이크로 담아낸 보비 샌즈와 도미니크 신부(리엄 커닝햄)와의 대담 장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신념과 폭력, 순응과 저항, 생명과 윤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상대를 설득하는 대화 장면이지만 누가 이길지 알 수 없고, 분명한 승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비 샌즈의 정체성에 대해 어떠한 가치 판단도 내리지 않고 단지 그 순간을 담아내, 관객들이 각자 생각하도록 이끌어 내는 연출력이 돋보인다.
“죽고 나면 삶을 알 길이 없어 … 기나긴 투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허사야 … 종일 갇힌 채로 배설이나 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면 … 사후에 동상이나 하나 세워줄까 …”

도미니크 신부가 죽음을 각오한 단식을 막아 보기 위해 충분히 비난하고 꼬집으며 설득해 보지만 보비 샌즈는 동요하거나 흥분하지 않은 채 차분히 응수하며 결심을 굳힌다.
“제겐 신념이 있고, 그것이 가장 강력한 무기예요. … 저는 주저하지 않고 방관하지도 않고, 실천에 나설 거예요.”
보비 샌즈가 신부로부터 얻어 피운 담배의 꽁초를 비벼 마지막 불씨까지 야무지게 꺼뜨리는 것은 그의 강직한 신념과 그로 인해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주님의 눈은 의인을 보시고, … 넋이 짓밟힌 이를 구원하신다”는 배경의 대사는 그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강렬한 내용이지만 영화는 결코 선동하지 않는다. 무척 담대하고 조용하게 관조하는 흐름이 오히려 설득력을 더한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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