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피핑톰(Peeping Tom)’이란 관용적 표현이 있다. 엿보기 좋아하는 사람, 관음증 환자 등을 뜻하는 말이다.
피핑톰의 유래는 11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중서부에 있는 코번트리 지역의 영주가 주민들에게 고액의 세금을 부과했다. 마을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영주의 부인 고다이버(Lady Godiva)가 남편에게 세금을 낮춰달라고 요청했다. 영주의 반응은 냉담했다. “어림도 없어! 당신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성내를 한 바퀴 돈다면 또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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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코번트리 지역에 세워진 고다이버 부인의 동상. 11세기 영국에서 주민들의 세금을 낮추기 위해 알몸으로 말을 타고 성내를 돌아다닌 고다이버 부인을 기리고자 세워졌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고다이버 부인은 남편의 예상을 깨고 실제로 그렇게 하겠다고 나섰다. 대신 주민들한테 자신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동안 모두 집안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창문을 가리라고 전했다. 영주 부인의 희생에 감격한 마을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딱 한 사람, 노총각 톰(Tom)만이 거부했다. 창문을 가린 커튼을 살짝 들춰 말을 탄 고다이버 부인의 알몸을 엿본 것이었다. 이 일로 벌을 받은 것인지 톰은 그만 두 눈이 멀고 말았다.
이것이 엿보기 좋아하는 사람을 ‘피핑톰’이라고 부르게 된 계기다. 밸런타인데이(2월 14일)나 화이트데이(3월 14일)에 호황을 맞는 초콜렛 상품 중에서 유명한 ‘고디바’라는 브랜드는 바로 이 ‘피핑톰’ 일화에 등장한 고다이버 부인의 이름에서 따왔다.
최근 이웃집에 사는 여성들의 나체사진을 찍은 혐의(성폭력범죄처벌법상 카메라 등 이용 촬영)로 기소된 30대 남성 A씨의 사연이 화제가 됐다. A씨에 따르면 그는 2015년 7월 3일 밤 12시쯤 너무 더워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창문을 열어둔 채 알몸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던 이웃집 여성 2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A씨는 순식간에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와서 창틀에 설치한 뒤 진지하게 촬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이를 눈치 챈 여성들의 신고로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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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법은 열린 창문을 통해 보이는 이웃집 여성의 알몸을 촬영한 혐의로 기소된 30대 남성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재판에 넘겨진 A씨는 반성의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다소 억지스러운 논리를 폈다. “훔쳐보기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원초적 본능입니다. 고전문학이나 영화에서도 광범위하게 다루는 소재 아닙니까.”
그는 ‘당시 여성들은 일부 속옷을 입어 완전히 알몸인 것은 아니었다’며 선고유예를 요청하기도 했다. 선고유예란 유죄는 인정하되 그 형량의 선고를 하지 않는 것으로, 법적 효력 면에선 무죄 선고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직장인인 A씨는 형사처벌 사실이 회사에 알려질 경우 입을 불이익을 걱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은 ‘피핑톰’의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4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이 법원 형사16단독 김수정 부장판사는 A씨에게 벌금 300만원과 성폭력치료 프로그램 24시간 이수를 선고했다. 김 부장판사는 A씨가 촬영한 영상의 몰수도 함께 명령하며 “죄질이 좋지 않다”고 일갈했다. 본능을 적절히 제어하지 않은 ‘피핑톰’의 말로가 비참하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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