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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이즈의 무희’ 그리워한 백석… 바다엔 고독한 시만 출렁거렸다

입력 : 2016-02-01 21:16:53 수정 : 2016-02-01 21: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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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즈반도로 떠난 문학기행 대나무 울타리로 막아놓은 해변 너머로 연록의 바다는 멀어질수록 청록으로 짙어지다가 뿌연 섬에 이른다. ‘이즈의 무희’의 고향이 저 섬이었을 것이다. 시인 백석(1912~1995)이 일본 유학 시절 ‘이즈 반도’를 여행한 배경에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의 데뷔작 ‘이즈의 무희’ 소설과 영화가 있으리라는 추측은 자연스럽다. 이즈반도는 온천이 많은 곳으로 일찍이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한 일본의 유명 인사들이 요양과 교류를 위해 들렀던 곳이기도 하니 백석의 관심도 자연스레 이곳에 쏠렸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백석은 도쿄에서 배를 타고 올 수도, 기차로 슈센지(修禪寺)까지 와서 소설 속 무희네 연희패들 족적을 따라 아마기산(天城山)을 넘어 시모다 항 인근 가키사키(枾崎) 해변에서 그 시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백석 시인이 일본 유학 시절 다녀와 시를 지었던 이즈반도 가키사키 해변. ‘이즈의 무희’에 나오는 이곳에는 어린 무희의 고향 섬이 실루엣처럼 떠 있다. 백석은 이곳에서 ‘참대창’에 참치를 꿰어 말리는 풍경을 보았고 가슴앓이하는 병인의 쓸쓸함을 담았다.
“저녁밥때 비가 들어서/ 바다엔 배와 사람이 흥성하다// 참대창에 바다보다 푸른 고기가 께우며/ 섬돌에 곱조개가 붙는 집의 복도에서는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즉하니 물기에 누굿이 젖은 왕구새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앓는 사람은 참치회를 먹지 못하고 눈물겨웠다// 어득한 기슭의 행길에 얼굴이 해쓱한 처녀가 새벽달같이/ 아 아즈내인데 병인病人은 미역 냄새 나는 덧문을 닫고 버러지같이 누었다”(‘시기枾崎의 바다’)

백석의 다른 시들도 그렇듯이 평안도 고향 사투리가 원색적으로 들어 있는 시편이라서 해독하기 수월치는 않지만 느낌만은 선명하다. 대나무가 많은 고장에서 참대를 깎아 세워 그 위에 ‘바다보다 푸른 고기’를 끼워서 말리는 풍경은 높고 쓸쓸하다. 이슥한 저녁에 물기가 밴 왕골로 짠 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앓는 사람’은 참치회도 먹지 못하니 눈물겹다는 시인의 언설. 그 눈물겨운 사람은 시인인가, 남이즈 시모다 항 인근 가키사키 바다의 병든 어부인가. 창 너머 어둑한 행길에 새벽달같이 해쓱한 얼굴로 스쳐가는 처녀는 첫사랑과 헤어져 시모다 항구 주점에서 쓸쓸히 늙어가는 이즈의 무희인가. 아 아즈내(초저녁)인데, 아픈 사람은 미역 냄새 풍겨오는 덧문을 닫고 ‘버러지같이’ 누워버렸다. 누운 것은 시인인가, 어부인가.

백석은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아 도쿄의 아오아먀(靑山)학원에 유학하여 4년(1930~1934)간 영문학을 공부했다. 아직 시인으로 데뷔하기 전인데, 이 시기에 백석은 이즈반도를 여행한 후 ‘시기의 바다’와 ‘이즈국주가도(伊豆國湊街道)’ 시 두편과 ‘해빈수첩’이라는 산문 한편을 남겼다. 귀국 후 펴낸 첫 시집 ‘사슴’에 수록된 ‘시기의 바다’는 ‘통영’과 비슷한 정조를 띤 시편으로 기행지 이름을 시 제목으로 내세우는 백석 스타일과 쓸쓸한 바닷가 정조를 읊는 맥락에서 닮았다.

시사랑문인협의회 회원들이 시즈오카 찻집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시사랑문인협의회’(회장 최동호) 문학기행을 따라 지난 주말 일본 시즈오카현 남이즈 시모다 항구와 아마기산 인근을 돌아보았다. 기행에 동참한 최동호 이숭원 유성호 교수, 한세정 정수연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 기행문을 작성하는 중이다. 일행은 시즈오카 공항에 내려 두 시간에 걸쳐 해안의 산맥 속 깊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시모다 항까지 갔다. 시모다 항 인근에 백석이 시를 남긴 ‘가키사키 해변’이 있다. 시즈오카에서 이즈반도 시모다 항 가는 길 연변 산속에서는 봄 산의 왕벚꽃나무처럼 하얀 온천 굴뚝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 올랐다. 이즈의 무희에 나오는 연희패들이 들렀을 법한 온천의 저녁밥 짓는 연기 같다.

시사랑 회원들은 이날 저녁 시모다항 여관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백석의 시와 자작시와 클라리넷 연주까지 곁들인 시낭송의 밤을 ‘아즉하니’ 보냈다. 이번 기행의 단장으로 참여한 강은교 시인은 ‘어둑한 기슭 행길에 새벽달같이 선 해쓱한 처녀’에 대한 백석의 애틋한 감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밤에 의미를 부여했다.

시기 해변은 바람이 거셌다. 시모다 항 뒷길을 배회하다 우리는 백석이 노래한 이즈 해변의 가로를 달려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 이즈의 무희들이 넘은 아마기 고개로 향했다.

“녯적본의 휘장마차에/ 어느메 촌중의 새 새악시와도 함께 타고/ 먼 바닷가의 거리로 간다는데/ 금귤이 눌 한 마을마을을 지나가며/ 싱싱한 금귤을 먹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이두국주가도伊豆國湊街道’)

옛날식 휘장마차에 촌에서 온 새색시도 같이 타서 가키사키 해변길을 달리는 가슴은 콩닥거린다. 게다가 조선에서 맛보기 힘든 시큼한 금귤을 먹는 일이라니, 얼마나 즐거운가. 백석의 시편들은 쓸쓸하고 슬픈 정조가 돋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먹을 것을 소재로 한 시편에서는 감각적인 즐거움이 넘친다고 기행에 참가한 유성호 평론가는 말했다. 백석은 “정서적 비극성이라는 어둑함과 감각적 즐거움이라는 밝음”으로 요약된다는데 가슴앓는 이가 등장하는 가키사키 시편과 금귤이 등장한 이즈 해변의 시편은 백석의 향후 시 전개를 상징하는 의미심장한 두 편이라는 얘기다.

가키사키 해변을 달리는 내내 그랬지만, 아마기 고개를 향해 산속으로 진입한 길 연변에서도 귤나무들은 수시로 등장했다. 조선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시고 달콤한 열매를 먹으며 옛적 휘장마차에 올라 푸르디푸른 태평양가를 촌 새색시와 함께 따각거리며 갔던 그 기분이 그대로 달리는 버스 안으로도 휘몰아 들어왔다. 버스는 이내 깊은 산속으로 접어든다. 이즈의 무희가 넘어왔던 아마기 고개로 향하는 길이다.

1927년 발표한 ‘이즈의 무희’는 스무살짜리, 도쿄에서 이즈로 여행 온 고등학생이 아마기 고개에서 무희의 연희패와 만나 사모다 항까지 동행하는 이야기다. 도중에 열네살짜리 천진한 ‘가오루’와 애틋한 교감을 하는데 그 정서는 황순원의 ‘소나기’와 닮았다. 무희는 온천에서 목욕을 하다 학생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알몸으로 부끄럼도 모른 채 뛰어나와 손짓을 할 정도로 투명하고 애잔한 캐릭터다. 그들은 시모다 항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한다. 시모다 항은 온천장을 흘러다니는 지방 순회 연희패들이 객지에서 그리워하는 고향을 닮은 항구였다. 오전에 떠나온 시모다 항은 바람이 거셌고, 항구 뒷길에서는 태평양에서 떠오른 오전 태양이 늘어진 빈 버드나무 가지를 야윈 겨울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시모다(일본)= 글·사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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