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바보처럼 돈을 몰랐다. 6·25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난 온 박사는 복음병원을 세워 본격적인 인술의 길에 들어섰다. 원장인 그의 월급은 언제나 적자였다. 번번이 급여를 가불해 환자들의 수술비를 대신 내줬기 때문이다. 심지어 치료비가 없는 환자에게 밤중에 뒷문을 열어놓을 테니 몰래 도망치라고 했다. 헐벗은 환자에게 내복을 사주고, 영양이 부족한 환자에겐 ‘닭 두 마리 값’을 처방했다.
박사는 북에 남은 아내를 그리며 독신으로 살았다. 남들이 재혼을 권유하면 “내 반쪽은 북쪽에 있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울밑에선 봉선화야’를 틈틈이 불렀다. 아내가 가르쳐준 그의 사부곡(思婦曲)이었다. 홀로 잠자리에 든 박사는 꿈속에서 자주 아내를 만나곤 했다. 잠결에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고 아내인 줄 착각해 문을 열고 나간 적도 있었다. 그런 박사에게 꿈속의 아내를 실제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던 정부가 박사에게 특별상봉을 주선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산가족들과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끝내 뿌리쳤다. 그러고는 “나는 아내의 사진이라도 한 장 갖고 있으니까”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한평생 사랑과 봉사의 길을 걸은 박사도 크게 화를 내는 일이 있었다.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이 찾아와 흉상을 만들겠다는 의견을 냈다. “내 흉상을 만드는 놈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스승의 일갈에 제자들은 놀라 주저앉고, 함께 온 사진사는 방밖으로 뛰쳐나갔다.
세속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박사는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였다. 병원장과 서울대 교수를 지냈지만 조그마한 집 한 채 없었다. 정년퇴임 후에 머문 집은 복음병원의 옥탑방이었다. 그가 남긴 재산은 1000만원이 든 예금통장이 전부였다. 그 돈마저 자신의 육신을 돌봐준 간병인에게 모두 주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못 올 것 같아 미리 왔네!” 박사는 남몰래 돌보던 환자에게 이 말을 유언처럼 남긴 채 20년 전 성탄절에 이승을 떠났다. 그리고 천상에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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