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열두 살이던 지난 1996년 12월25일. 이른 아침 잠에서 깼더니 ‘역시나’ 곱게 포장된 선물이 베개 옆에 놓여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올해도 산타할아버지가 다녀가셨군. 잘 살았네.’ 뿌듯한 마음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신났다. 이 정도면 1996년도 잘 마무리했구나 싶었다. 포장지를 뜯으니 무척 갖고 싶던 만화 주인공 로봇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옆에 쪽지가 하나 있었다. 예전에 없던 쪽지가 있으니 순간 뭘까 했다. 산타할아버지가 남긴 편지였다.
이상했다. 어디서 많이 본 글씨체가 흰 종이를 수놓고 있었다. 분명 기자를 칭찬하는 편지였는데, 많이 낯익었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산타할아버지를 가장한 글씨체는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렇게 기자의 산타클로스 환상은 열두 살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때부터 기자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었다. 사실 썰매를 조심스레 주차 후, 아무도 모르게 집 문을 따고 들어와 선물만 놓고 간다는 게 가능하지 않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름 산타클로스는 가슴 속에 고이 말뚝을 박았던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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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유치원생이던 시절,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찾아온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고 있다. 당시 받았던 선물은 기관차 모양의 은색 연필깎이였다. 산타할아버지를 보고 신기해한 것은 이해하지만, 왜 저 고운 손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
누구나 산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다. 비록 산타의 존재가 무엇인지 깨달았더라도 아직은 순수하고 싶은 마음에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떠올리는 소중한 기억이 있다. 지금 기사를 보는 여러분 중에도 지난밤 쌔근쌔근 잠자는 자녀 머리맡에 선물을 고이 두고 왔을 부모가 있다. 곧 깨어난 자녀가 “우와!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가셨어요!”라고 소리칠 모습에 뿌듯할 게 분명하다.
옛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이제는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연말이 되어도 흥이 나지 않고, 캐럴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다면 혹시 어렸을 적 순수함을 잃었기 때문 아닐까.
서울 구로구의 한 어린이집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지난 22일, 산타 이벤트를 열었다. 덥수룩한 흰 수염을 단 '산타할아버지'가 “허허허” 웃으며 빨간 자루를 들고 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그런 방식이다.
어린이집 원장 김윤수 씨는 세계일보에 “놀이(수업) 하다보면 산타할아버지께서 오실 거라는 말에 아이들의 기대하는 티가 역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산타할아버지 등장에 눈이 동그래진 아이들은 자기가 선물 받을 때까지 움직이지도 않고 기다렸다”고 덧붙였다.
선물 받은 아이들은 모두가 기뻐했다. 김씨도 행복했다. 그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렸을 때 나도 그런 기분이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아이들이) 얼마나 설렐지 궁금했다”고 웃었다.
“아이들에게 산타란 어떤 존재일 것 같으냐”는 질문에 김씨는 “노래나 이야기에 나오는 산타할아버지 이미지”라며 “멋진 선물을 주는 신기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할 것 같다”고 답했다.
만 2세 반을 맡은 문수정 씨는 “한 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를 보고 무서워한다”며 “월령이 빠르거나 나름 ‘경험’을 해본 영아들은 산타할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고, 선물 주시는 분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씨는 “6~7세 아이들보다는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많이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다툴 때 ‘구름 속 산타 마을에서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지켜보고 계실 것 같은데~’라고 하면 바로 싸움을 멈춘다”고 웃었다.
아이에게 산타가 어떤 존재일까 하는 내용에 문씨도 앞선 김씨의 답과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어려서인지 산타의 구체적 존재감보다는 노래 가사나 이야기처럼 울거나 싸우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안주고, 착하게 지내면 선물 주는 고마운 할아버지 정도로 아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에게 “언제까지 산타를 믿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김씨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믿었던 것 같다”고 답했다. 어떤 선물을 받을지 궁금했다던 그는 “지금 초등학생들을 보면 당연히 (산타의 존재를) 안 믿는 분위기”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문씨는 “(내가)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선물을 받지 못한 적이 있다”며 “혹시 나쁜 아이였나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선물이 없었던 이유로 ‘어려운 경제상황’을 지목한 그는 “옆집 언니들을 따라 교회에 가면 빵, 과자 등을 먹는 날 정도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한 30대 주부 A씨도 크리스마스 산타 대작전에 나섰다. 그와 남편 사이에는 올해 갓 돌을 넘긴 딸이 있다.
A씨는 “아기가 너무 어려서 산타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며 “동심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선물이나 편지를 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의 또 다른 장점을 언급했다.
A씨는 “아이 선물을 준비하면서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며 “부부간의 소통 차원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웃었다. 단순히 아기에게 선물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부부의 애정을 더 깊게 할 수 있었다고 A씨는 생각했다.
누구나 자라면서 어린 시절의 환상은 깨진다. 그 환상을 간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회의 때가 묻지 않는 한 어린 시절의 꿈과 환상을 영원히 가슴속에 품을 수는 없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어른이’ 여러분은 산타를 언제까지 믿었나요?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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