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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유니폼 넘버 7] 고교시절부터 스타였던 바람의 아들 이종범

입력 : 2015-12-27 09:00:00 수정 : 2015-12-27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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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이 된 유니폼 넘버, 7번의 주인공> …③ 이종범

◇고교시절부터 스타였던 바람의 아들

이종범(1970년 8월 15일생)은 한국프로야구사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스타이다. 한편으로는 절정의 시기 일본에 진출, 상대 투수공에 맞은 이후 제기량을 회복치 못한 아픔을 간직한 선수이기도 하다.

온 국민의 피를 들끓게 한 선수라고 말하기에는 이승엽이나 박병호에 비해 파워가, 상대를 공포에 떨게했다고 믿기에는 선동렬 최동원 유현진처럼 포수가 아닌 야수로 포지션이 애매했다.

하지만 수비와 공격 모두 소속팀으로선 그야말로 보배 그 자체였다.

당연히 상대는 골치덩어리였다. .

이종범과 정면승부하기에는 그의 타격솜씨가 뛰어났다.

또 걸려 보내면 그의 또 다른 이름 '바람의 아들'이 말해주듯 2루를 밥먹듯이 훔쳤다.

이종범은 광주일고 재학시절부터 스타 중 스타로 대접받았다.

고2학년때 전국대회에 나가면 모든 3학년을 제치고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

당연히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 등 이른바 야구 1학군으로부터 엄청난 스카우트 공세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종범은 광주일고 동료 3명을 함께 받아준 건국대학교로 진로를 택했다.

자신보다는 동료를 위해 명문대학 유니폼을 포기한 것이다.

이종범의 실력은 어느 학교에서도 통했다. 즉각 국가대표 유격수 자리를 꿰찼다.

그에 밀려 한양대학교 유격수로 뛴 유지현이 국가대표팀에서 2루수로 자리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 1993년 해태 입단후 명성 드날려

이종범은 1993년 1차 지명을 받아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 삼성 라이온즈의 늦깍이 신인 양준혁에 밀려 신인왕을 놓쳤으나 1994년 한국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상, 1993년과 1997년 한국시리즈 MVP를 거머쥐었다.

이종범의 빠른 발과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으며 그가 2루에 있을 때 스퀴즈 번트작전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사인까지 나왔을 정도다.

상대가 번트수비를 해 1루에 던지는 사이 단숨에 홈까지 파고드는 것으로 상대에게 있을 수 없는 실수를 유도해 냈다.

이종범은 아직까지 국내 유격수로는 유일한 30-30(홈런 30개, 도루 30개)기록을 갖고 있다. 외국인 선수까지 범위를 넓혀도 아직은 NC 다이노스의 테임즈와 이종범 뿐이다.

◇ 일본행과 복귀, 은퇴와 영구결번

이종범은 많은 기대를 모으며 1998년 야수 출신으로는 사상 처음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했다.

하지만 전문인 유격수가 아닌 외야수로 수비 위치를 변경해 출전했다. 일본야구에 정통한 이들에 따르면 이종범의 유격수 능력은 발군이었지만 공을 글러브에 넣는 기술에서 일본선수들에게 떨어졌고 팀 사정과 맞물려 외야수로 넘어갔다.

여기에서 출전 56경기째인 1998년 6월 23일에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상대 선발 가와지리 데쓰로가 던진 120km대 커브에 팔꿈치를 맞아 골절상을 당한 뒤 2달 보름 가량 쉬었다.

이후 몸쪽 공에 트라우마에 가까운 어려움을 나타내는 등 예전 기량을 보이지 못한 채 2001년 7월 KIA로 이름을 바꾼 친정 타이거즈로 돌아 왔다.

이종범은 일본서 3시즌 반동안 타율 0.261, 홈런 27개의 평범한 기록밖에 남기지 못했다.

복귀후 2011시즌까지 11시즌을 더 뛴 이종범은 KBO통산 16시즌동안 통산타율 0.297, 194홈런, 510도루 기록을 남겼다.

이종범은 2012시즌을 준비하던 중 은퇴권고를 받고 유니폼을 벗었으며 2012년 5월 26일 은퇴식에서 그의 등번호 7번은 영구결번됐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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