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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계영배’의 의미 되새겨… 연말 술자리서도 ‘짐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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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2-20 20:26:41 수정 : 2015-12-20 20: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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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술 따를 작(酌)자의 변신 계영배(戒盈杯), 넘치는 것(盈)을 경계하는 술잔이다. 이 이미지는 곧 ‘넘침은 부족함만 못하리’의 의미로 활용된다. 조선 후기의 거상(巨商) 임상옥(林尙沃·1779∼1855)이 이 잔을 늘 주변에 두었다는 최인호 소설 ‘상도’(商道)의 이야기로 현대에 부활한 메타포다.

연말, 차고 넘치는 술잔에서 정(情) 찾으며 혹여 정(正)을 버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여러 이웃들의 술자리에 또는 뇌리(腦裏)에 먼저 띄워놓아야 할 물건이 아닐지. 바른 몸(체·體)과 마음(덕·德)과 앎(지·知)을 상징하는 말로 바를 正을 골랐다. ‘체덕지’는 사람 사는 것의 본디다. 

3차는 2차만, 2차는 1차만 못하다. 물론 3차도 1차만 못하다. 알면서도 왜 돈 깨지고 몸 깨지는 2차, 3차 고집할까? 계영배를 몰라서?
세계일보 자료사진
어진 미소 일품인 언론사 선배 노용욱 형님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퍼준 글을 보며 이 잔을 떠올렸다. 한문에 밝은 노 기자가 짐작, 참작, 수작, 작정 등 한자어를 재미나게 풀었다. 술 좀 작작 마시라는 뜻을 마음과 함께 담았을 터다. 그리움 피어난다. 그런데 ‘작’이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말들이니, 그냥 넘기기는 아깝다. 그 마음도 함께 베끼기로 한다.

이 ‘작’은 술독(유·酉)과 술 푸는 국자(작·勺)의 그림(글자)을 합친 酌자다. 한자가 그림에서 비롯한 것이고, 이런 그림 도안(디자인)을 서로 합쳐 여러 뜻을 품어내는 글자가 되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적당한 본보기 중 하나다. 어원을 살피지 않아도 글자 모양으로 추측할 수 있지 않은가. 한자는 이렇게 마음 품고 들여다보면 3500년 역사가 그 안에서 보인다.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의 계영배. 기원은 공자 시대의 옛 중국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술독에서 술을 푸는 것은 제사의 첫 절차였다. 비 오게 해 주소서, 전쟁 나간 여장군 왕비 부호(婦好·갑골문시대 상나라 왕 무정의 아내)가 이기게 해 주소서 따위의 염원(念願) 담은 술이었을 것이다. 손(우·又)으로 고기(육·肉)를 들어 신(神)에게 보이며(시·示) 제사를 지냈다. 제사 제(祭)자의 짜임이다. 함께 바쳤을 술은 신을 위한 음료였다. 서양도 그렇다.

계양배는 어느 선 이상 차면 저절로 모두 새나가 버린다는 술잔이다. 자료의 수치들은 7할(割)이 그 기준이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잔의 70%가 넘으면 안 되게 작정(酌定)하고 설계했다는 것이다. 술 따를 때 어느 선까지 왔는지 짐작(斟酌)을 잘 해야 하는 이유였겠다.

국어사전의 작정의 뜻은 ‘일의 사정을 잘 헤아려 결정(決定)함’이다. 술을 따를 때 어느 선까지 따라야 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하는 것에서 전이(轉移)된 뜻이리라. ‘무턱대고’ 등의 뜻 무작정(無酌定)이란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 대목에서 짐작을 잘 해볼 일이다.

옛날 도자기 술병을 보면 ‘술 따른다’는 말인 짐작이 왜 조심스럽게 상황을 지켜보는 의미의 짐작이 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꽃 무늬 위로 새가 내려앉은 12세기 고려자기 주자(注子).
미국 호놀룰루
미술관 소장품
짐작의 짐(斟)은 어림쳐서 헤아린다는 뜻이지만, 원래 작(酌)처럼 술을 푸거나 따른다는 뜻이고 지금도 그런 뜻으로도 쓴다. (술)그릇이나 국자에서 생겨난 글자인 말 두(斗)가 斟의 뜻 요소다. 심(甚)은 소리(발음)를 만드는 요소다. 짐작은 그래서 ‘술을 따른다’는 말이다.

사전은 짐작을 ‘사정이나 형편 따위를 어림잡아 헤아림’이라 새겼다. ‘술’ 얘기는 코빼기도 없다. 왜지? ‘작정’처럼 원래 의미가 증발되고, 전이된 (새) 의미만 유통되는 것이다. 그런데, 짐작은 왜 그런 뜻으로 전이됐을까?

계영배에 따르듯, 술을 따를 때는 ‘술자리 예법’에 맞게 7할 정도만 따르는 조심성이 필요하다. 괘씸죄는 반역죄보다 크다 하지 않던가. 넘쳐서 윗사람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치명상’이다. 시시한 속설이지만, 조심의 필요는 엄연하다. 말 그대로 짐작을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옛 토기(土器)나 도기(陶器), 자기(瓷器) 술병을 떠올려보자. 유리병처럼 병의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잔이 얼마나 찼는지를 눈대중으로 살피면서 동시에 병의 무게와 내용물의 찰랑거림을 손으로 정밀하게 느껴 병 안의 술이 얼마나 남았는지 감을 잡아야하는 것이다. 영화 ‘취권’(醉拳)의 인물들처럼 마구 들이부어선 될 일이 없다. 그 짐작이 이 짐작이 된 이유다.

수작(酬酌)의 酬는 갚는다는 뜻, 내게 온 잔을 돌려주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술잔으로 (받은 호의를) 갚는 것이니 술잔이 오고 가는 풍경이다. 이 말의 뜻은 이렇게도 진화(進化)한다. ‘(여성에게) 수작을 걸다, 부리다’는 말처럼 말을 주고받거나 엉뚱한 의도(意圖)나 행동을 남에게 벌이는 것으로 변신한 것이다.

‘참고(參考)하여 적당히 헤아린다’는 참작(參酌)에도 술병과 국자 酌이 들었다. 석 삼(三) 또는 ‘셋이 어울린다’는 뜻에서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는 말로 쓰이는 參과 합체해 사전의 그런 뜻이 됐을 것이다. 혼자 푸는 술 독작(獨酌), 스스로 따라 마시는 자작(自酌), (님과 함께) 마주 보고 마시는 대작(對酌), 미리 마신 (한 잔) 술 전작(前酌) 등 酌의 쓰임은 많다.이런 쓰임은 간혹 ‘짐작’처럼 은유(隱喩)의 재료가 됐다.

‘짐작’이 들어간 숙어 자짐구작(字斟句酌)은 한자 한자 글자를 살피고 문장의 각 구절(句節)을 꼼꼼히 검토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퇴고(推敲)다. 중요한 과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으나, 서너해 전 한 중국 기자 친구가 재미있는 말이라고 들려줘 이 말을 메모했던 기억이 있다. 술 마시고 시 읊던 이태백 류(流) 한시(漢詩) 전통의 반영인가?

시나 마음은 넘쳐도 좋으리, 허나 술을 좀 작작 드시라.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 사족(蛇足)

아는 이 많아 계영배를 따로 설명하는 것은 사족 아닐까 저어한다. 그래도 처음 듣는 이들 위해 몇 자 쓰기로 작정(作定)했다. 이 ‘작정’은 그 酌定과 약간 다르다. 어감(뉘앙스)의 차이다. 일을 어떻게 하기로 결정한다는 뜻이다.

큰 상인 임상옥에게 계영배가 어찌 술만을 경계하는 뜻이었을까? 어느 한도를 넘으면 일을 모두 망친다는 스스로의 결기였을 것이다. 돈도, 사랑도, 권력도 비슷하지 않겠는가. 술잔의 원리를 마음에 새기고 스스로 경계하는 현명함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멋진 작가 고 최인호의 심지(心地)이기도 했으리라.

커피머신의 사이펀이나 양변기의 구조에 응용되는 기술과 흡사하다고 한다. 공자가 제나라 군주 환공(桓公)의 사당에서 본 그릇으로, 환공 살았을 때 늘 곁에 두고 과욕을 경계했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전라도 화순의 실학자 하백원과 도공 우명옥이 이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이 술잔이 바로 임상옥의 그 계영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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