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차고 넘치는 술잔에서 정(情) 찾으며 혹여 정(正)을 버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여러 이웃들의 술자리에 또는 뇌리(腦裏)에 먼저 띄워놓아야 할 물건이 아닐지. 바른 몸(체·體)과 마음(덕·德)과 앎(지·知)을 상징하는 말로 바를 正을 골랐다. ‘체덕지’는 사람 사는 것의 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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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는 2차만, 2차는 1차만 못하다. 물론 3차도 1차만 못하다. 알면서도 왜 돈 깨지고 몸 깨지는 2차, 3차 고집할까? 계영배를 몰라서? 세계일보 자료사진 |
이 ‘작’은 술독(유·酉)과 술 푸는 국자(작·勺)의 그림(글자)을 합친 酌자다. 한자가 그림에서 비롯한 것이고, 이런 그림 도안(디자인)을 서로 합쳐 여러 뜻을 품어내는 글자가 되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적당한 본보기 중 하나다. 어원을 살피지 않아도 글자 모양으로 추측할 수 있지 않은가. 한자는 이렇게 마음 품고 들여다보면 3500년 역사가 그 안에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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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의 계영배. 기원은 공자 시대의 옛 중국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계양배는 어느 선 이상 차면 저절로 모두 새나가 버린다는 술잔이다. 자료의 수치들은 7할(割)이 그 기준이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잔의 70%가 넘으면 안 되게 작정(酌定)하고 설계했다는 것이다. 술 따를 때 어느 선까지 왔는지 짐작(斟酌)을 잘 해야 하는 이유였겠다.
국어사전의 작정의 뜻은 ‘일의 사정을 잘 헤아려 결정(決定)함’이다. 술을 따를 때 어느 선까지 따라야 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하는 것에서 전이(轉移)된 뜻이리라. ‘무턱대고’ 등의 뜻 무작정(無酌定)이란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 대목에서 짐작을 잘 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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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도자기 술병을 보면 ‘술 따른다’는 말인 짐작이 왜 조심스럽게 상황을 지켜보는 의미의 짐작이 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꽃 무늬 위로 새가 내려앉은 12세기 고려자기 주자(注子). 미국 호놀룰루 미술관 소장품 |
사전은 짐작을 ‘사정이나 형편 따위를 어림잡아 헤아림’이라 새겼다. ‘술’ 얘기는 코빼기도 없다. 왜지? ‘작정’처럼 원래 의미가 증발되고, 전이된 (새) 의미만 유통되는 것이다. 그런데, 짐작은 왜 그런 뜻으로 전이됐을까?
계영배에 따르듯, 술을 따를 때는 ‘술자리 예법’에 맞게 7할 정도만 따르는 조심성이 필요하다. 괘씸죄는 반역죄보다 크다 하지 않던가. 넘쳐서 윗사람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치명상’이다. 시시한 속설이지만, 조심의 필요는 엄연하다. 말 그대로 짐작을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옛 토기(土器)나 도기(陶器), 자기(瓷器) 술병을 떠올려보자. 유리병처럼 병의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잔이 얼마나 찼는지를 눈대중으로 살피면서 동시에 병의 무게와 내용물의 찰랑거림을 손으로 정밀하게 느껴 병 안의 술이 얼마나 남았는지 감을 잡아야하는 것이다. 영화 ‘취권’(醉拳)의 인물들처럼 마구 들이부어선 될 일이 없다. 그 짐작이 이 짐작이 된 이유다.
수작(酬酌)의 酬는 갚는다는 뜻, 내게 온 잔을 돌려주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술잔으로 (받은 호의를) 갚는 것이니 술잔이 오고 가는 풍경이다. 이 말의 뜻은 이렇게도 진화(進化)한다. ‘(여성에게) 수작을 걸다, 부리다’는 말처럼 말을 주고받거나 엉뚱한 의도(意圖)나 행동을 남에게 벌이는 것으로 변신한 것이다.
‘참고(參考)하여 적당히 헤아린다’는 참작(參酌)에도 술병과 국자 酌이 들었다. 석 삼(三) 또는 ‘셋이 어울린다’는 뜻에서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는 말로 쓰이는 參과 합체해 사전의 그런 뜻이 됐을 것이다. 혼자 푸는 술 독작(獨酌), 스스로 따라 마시는 자작(自酌), (님과 함께) 마주 보고 마시는 대작(對酌), 미리 마신 (한 잔) 술 전작(前酌) 등 酌의 쓰임은 많다.이런 쓰임은 간혹 ‘짐작’처럼 은유(隱喩)의 재료가 됐다.
‘짐작’이 들어간 숙어 자짐구작(字斟句酌)은 한자 한자 글자를 살피고 문장의 각 구절(句節)을 꼼꼼히 검토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퇴고(推敲)다. 중요한 과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으나, 서너해 전 한 중국 기자 친구가 재미있는 말이라고 들려줘 이 말을 메모했던 기억이 있다. 술 마시고 시 읊던 이태백 류(流) 한시(漢詩) 전통의 반영인가?
시나 마음은 넘쳐도 좋으리, 허나 술을 좀 작작 드시라.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 사족(蛇足)
아는 이 많아 계영배를 따로 설명하는 것은 사족 아닐까 저어한다. 그래도 처음 듣는 이들 위해 몇 자 쓰기로 작정(作定)했다. 이 ‘작정’은 그 酌定과 약간 다르다. 어감(뉘앙스)의 차이다. 일을 어떻게 하기로 결정한다는 뜻이다.
큰 상인 임상옥에게 계영배가 어찌 술만을 경계하는 뜻이었을까? 어느 한도를 넘으면 일을 모두 망친다는 스스로의 결기였을 것이다. 돈도, 사랑도, 권력도 비슷하지 않겠는가. 술잔의 원리를 마음에 새기고 스스로 경계하는 현명함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멋진 작가 고 최인호의 심지(心地)이기도 했으리라.
커피머신의 사이펀이나 양변기의 구조에 응용되는 기술과 흡사하다고 한다. 공자가 제나라 군주 환공(桓公)의 사당에서 본 그릇으로, 환공 살았을 때 늘 곁에 두고 과욕을 경계했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전라도 화순의 실학자 하백원과 도공 우명옥이 이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이 술잔이 바로 임상옥의 그 계영배였다.
아는 이 많아 계영배를 따로 설명하는 것은 사족 아닐까 저어한다. 그래도 처음 듣는 이들 위해 몇 자 쓰기로 작정(作定)했다. 이 ‘작정’은 그 酌定과 약간 다르다. 어감(뉘앙스)의 차이다. 일을 어떻게 하기로 결정한다는 뜻이다.
큰 상인 임상옥에게 계영배가 어찌 술만을 경계하는 뜻이었을까? 어느 한도를 넘으면 일을 모두 망친다는 스스로의 결기였을 것이다. 돈도, 사랑도, 권력도 비슷하지 않겠는가. 술잔의 원리를 마음에 새기고 스스로 경계하는 현명함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멋진 작가 고 최인호의 심지(心地)이기도 했으리라.
커피머신의 사이펀이나 양변기의 구조에 응용되는 기술과 흡사하다고 한다. 공자가 제나라 군주 환공(桓公)의 사당에서 본 그릇으로, 환공 살았을 때 늘 곁에 두고 과욕을 경계했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전라도 화순의 실학자 하백원과 도공 우명옥이 이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이 술잔이 바로 임상옥의 그 계영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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