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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잘 알려진 남편, 베일에 싸인 아내'…고종·명성황후의 초상

입력 : 2015-10-22 16:06:25 수정 : 2015-10-22 1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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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어크박물관에서 고종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최근 새로 발견됐다. 1905년 대한제국 황실을 방문한 미국 사절단에 선물로 준 것이다. 고종 사진은 이것 말고도 여러가지 버전이 전하고 있어 후세에 가장 많이 모습을 알린 군주다. 반면 아내이자 국정의 동반자였던 명성황후의 모습은 알 길이 없다. 명성황후을 찍은 사진이라면 나돈 것이 있었지만, 다른 여성이거나 명성황후라고 보기 힘들어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다. 

최근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서 새로 발견된 고종 황제의 초상 사진. 고종은 자신과 대한제국의 존재를 서구 열강에 알리기 위해 사진을 활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국정 최고 책임자였고, 신문물인 사진을 가장 먼저 접했던 부부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 이유는 뭘까. 사진을 통해 국내·외에 자신과 조선이 존재감을 알리려 했던 고종과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으나 가부장적 질서에 여전히 구속될 수 밖에 없었던 명성황후의 다른 처지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

◆사진으로 대한제국을 알리려한 고종

전통사회에서 왕의 얼굴은 신성시됐다. 왕의 얼굴을 그린 어진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동원돼 제작됐고, 궁궐 깊숙히 모셔져 제의의 대상이 됐다. 고종의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종은 사진사들을 불러들여 촬영을 하게 했고, 심지어 밖으로 내돌리는 걸 허락했다. 아들 순종과 함께 촬영을 하기도 했다. 이전과 비교하면 매우 예외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기울어가던 대한제국과 흔들리던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려 했던 고종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서양식 복장을 한 고종의 사진. 근대화된 대한제국의 이미지를 심어주려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자 고종이 서구 열강의 힘을 빌려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당시 서구의 국가들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통치자의 초상을 교환하는 것이 상례였다. 실제 1880년대 조선에 들어온 외교관들은 고종의 초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번에 발견된 뉴어크박물관의 사진 역시 미국 사절단을 만나며 선물로 준 외교용이었다. 당시 고종은 일본의 한국 병탄 의도가 노골화하자 미국의 도움을 얻고자 사절단을 극진히 대접했다. 미국 사절단이 한국 방문에 앞서 일본을 찾아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기로 한 사실을 모르는 상황에서 준 것이라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사진이기도 하다. 고종이 유화로 초상을 그리게 해 외국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가지고 가게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서양식의 복장을 차려 입거나 가구를 배치한 뒤 사진을 찍어 근대화된 대한제국의 이미지를 심어주려 한 것으로도 보인다.

덕성여대 권행가 연구교수는 “처음에는 사진이라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찍기 시작했을 것”이라며 “이후에는 (서구 열강과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초청한 외국인을 통해 촬영을 하고, 외교를 위해 사진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1893년 프랑스의 한 잡지에 명성황후의 모습이라며 실린 사진. 명성황후를 만난 외국인들은 “날카로운 눈, 아름다운 여성” 등으로 그녀를 묘사했지만, ‘명성황후 사진’으로 확정된 것은 아직 없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잃어버린 얼굴’, 명성황후

고종의 사진이 많이 남아 있고, 사진술이 확산하던 시절이었던 때라 자연스럽게 명성황후를 찍은 사진에 대한 관심이 크다. 명성황후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며 나돈 사진도 여러 장 있었다. 대개는 서양인이나 일본인이 제작해 유포했다. 시기적으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집중되어 있고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으로 조선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각종 출판물에 실렸던 것들이다.

프랑스 월간지인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10월호에 실린 사진이 대표적이다. 잡지는 4쪽에 걸쳐 조선의 풍물과 왕실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싣고 있는데 , 그 중 하나에 ‘민, 조선의 황후’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명성황후를 가까이서 만났던 이사벨라 비숍, 언더우드 등은 명성황후를 “날카로운 눈, 지적이며 강한 성격, 쾌활하고 고상한 정신적 자질의 소유자,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잡지에 실린 사진은 이런 설명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 최근 경매를 통해 해당 잡지를 입수한 차길진 후암미래연구소 대표는 “진위 여부를 밝히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지만, 이 사진을 다시 볼 필요는 있다”고 주장했다. 차 대표는 “권위있는 프랑스의 잡지에 실린 사진이고, 기사를 쓴 기자는 당시로서는 명망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차 대표에 따르면 기사를 작성한 거빌(A B de Guerville)은 각국의 왕실, 황제, 대통령과 인터뷰를 주로 진행한 기자로 1892년 11월 경복궁을 방문했다. 지금까지는 이 사진이 다른 출판물에도 여러 차례 실리면서 ‘궁녀’ 혹은 ‘시중’이라고 소개되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명성황후는 아니라는 의견이 많았다. 

러시아의 한 일간지에 실린 명성황후의 초상화. 명성황후를 만난 이의 말을 전해 들은 뒤 그린 것이라고 전한다. 서양인의 얼굴에 중국식 머리를 하고 있어 명성황후의 실제 모습을 반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명성황후와 관련된 사진이 극히 적고, 그녀의 사진이라고 확정할 만한 것이 없는 이유는 뭘까. 여성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부정적이었던 당시의 남성 중심 질서 때문이라는 분석이 참고할 만하다. 사진 도입기에 자신의 초상을 찍기 위해 사진기 앞에 선다는 것은 외교적 공간이나 공적 공간에 접근이 가능한 남성에게나 허용된 일이었던 것이다. 권 교수는 “조선 초기만해도 왕후의 초상이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후기에 이르면 내외법과 가부장적 질서가 고착화되면서 불가능해진다”며 “명성황후 역시 이런 남성 중심의 초상 재현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사진이 극히 적은 것이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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