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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 씻어낸 목욕탕… 힐링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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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9-21 20:51:49 수정 : 2015-09-21 20: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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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목욕탕 시리즈’ 전시 여는 英 신예작가 캐럴라인 워커 여인의 목욕 장면은 오래전부터 서양 화가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아 왔다. 특히 서양인들의 동양쪽 여성들에 대한 시선은 환타지 요소가 강했다. 19세기 화가 앵그르의 작품 ‘터키탕’이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많은 누드의 여인들이 등장하는 그림은 당시 80대였던 앵그르가 터키 이스탄불의 욕탕에 관한 편지글을 읽고 상상으로 그려낸 것이다.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목욕탕이라는 공간마저도 신비스럽고 매혹적인 곳으로 풀어내고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런던 등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영국의 떠오르는 신예작가 캐럴라인 워커(Caroline Walker·33)도 여인의 목욕탕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목욕탕이라는 공간 탐구는 지난해 그가 부다페스트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다. 한국 전시를 위해 서울에 온 그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청색조가 돋보이는 작품 ‘Treatment Pool’
“부다페스트는 천연 온천으로 유명해 자연히 온 도시에 목욕탕이 즐비하다. 16세기 터키 스타일의 어두컴컴한 공간으로부터 웅장한 20세기 초 아르누보, 네오바로크 스타일까지 다양한 목욕탕들이 있다. 하나의 공간으로서 이런 묙욕탕들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목욕탕은 매우 개인적인 활동을 위한 공공시설이다. 말하자면 내밀하면서도 사회적이고 대중적인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목욕탕에는 뭔가 ‘딴세상’ 같은 느낌이 있다. 몇 세기에 걸쳐 똑같은 행위를 해온 증기 가득한 공간으로 들어서는 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어떤 영화 세트장이나 환상의 공간에 걸어들어가는 느낌이 있다.”

그는 그동안 대부분 연출된 사진을 가지고 작업해 왔다. 다양한 가정의 실내에서 여자 모델들이 일상생활의 포즈를 취하도록 연출하고 그것을 촬영해 그림의 소스로 사용했다. 여성작가로 남성적인 성적 시각에서 탈피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성성을 자연스럽게 그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허리와 엉덩이 선이 두드러지지 않은 모습들이다. 여성 연출가의 시각에서 연극무대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 내 작업은 주로 호화로운 저택이나 정원 등의 사적인 세팅에서 세심하게 연출된 시나리오의 결과였다. 목욕탕 시리즈는 아이폰으로 몰래 촬영한 사진으로 작업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욕탕에서 촬영할 때 일부 의아스러운 시선을 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놀라울 정도로 무반응을 보였다. 프라이버시 관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요즘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남녀가 구분되고 매우 사적인 이런 공간에서 촬영한다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욕탕 작업은 작가로서 컨트롤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자세 등 연출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안으로 그는 그림 속에서 인물들의 위치나 조명을 재구성했다.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가상의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현실을 전부 배제했다. 증기가 가득한 목욕탕 공간은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목욕탕을 소재로 작업한 작품 앞에 선 캐럴라인 워커. 그는 지난해 헝가리 부다페스트 목욕탕을 핸드폰으로 찍어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그리스 신화의 사이렌이나 인어, 물의 요정 같은 신화적 존재들을 포함하여 물의 상징성을 여성과 관계지었다. 나의 목욕탕 작업도 물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남성적 시각이 아니다. 19세기 남성 아티스트들의 오리엔탈주의의 욕탕 그림들은 현실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이국적이고 에로틱한 동양에 대한 서양 남성의 환상을 더듬는 수단이었다. 앵그르의 작품 ‘터키탕’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 본 어머니의 모습도 여성을 작업에 끌어 온 계기가 됐다. 대저택에서 주부로 살았던 어머니는 겉으로 보기에 완벽하고 행복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완벽함에 대한 환영으로 보였다. 여성을 여성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자는 시선이 움트기 시작했다.

“목욕탕이라는 주제는 현대 여성 작가들에 의해 새롭게 다루어지고는 있으나 대부분은 영화 같은 매체를 통해서다. 태시타 딘(Tacita Dean)과 카타지나 코지라(Katarzyna Kozyra)가 1990년대 만든 부다페스트 목욕탕 소재 영화들은 프라이버시의 개념과 힐링 공간으로서 목욕탕이 갖는 묘한 느낌을 다루었다. 현대적인 맥락에서 화가들은 이런 주제를 그다지 다루지 않았다. 회화에서 여성의 신체가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재해석하는 나의 관심과 더불어 목욕탕이라는 주제는 내가 탐구할 풍부한 테마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는 우연히 발견한 이미지나 모델을 이용해 촬영한 사진, 그리고 순전히 가상의 시나리오를 두루 포함하는 리서치 과정을 거친 건축 공간과 회화라는 가상 공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 이를 통해 서양 미술사에서 여성의 전형과 그것의 현대적 관계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나는 회화라는 미망(迷妄)을 위해 다양한 기법과 기재를 동원한다. 강렬한 단색조 조명이라든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벽지, 사람의 신체와 함께 병치된 그림 속 그림, 그리고 ‘실제’ 풍경이 나란히 공존하지만 이들은 모두 일종의 세팅이다. 어떤 경우에는 붓터치가 점차 추상적으로 해체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에서 창조된 공간이 뭔가 내러티브가 제시되고 있기는 한데 분명한 것이 없어, 불확실하게 남아 있는 가상의 공간임을 떠올리게 한다.”

감추기, 은폐, 감시는 그의 그림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들이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서로를 주시하고,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를 기다리거나, 우리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들에서는 관객이 관음자가 된다. 모두가 스스로 어떤 보이지 않는 시선이 되면서 미술사에서 관음증과 전형화된 여성성을 까발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캐럴라인 워커는 최근 리버플 워커아트갤러리에서 열린 ‘근현대 영국페인팅 작가’전에서 데이비드 호크니 등 거장들과 나란히 할 정도로 주목받고 있는 영국의 대표적인 차세대 작가다. 오는 11월12일까지 코오롱이 운영하는 비영리 전시공간 스페이스K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에선 목욕탕 시리즈를 볼 수 있다. (02)3496-7595

글·사진=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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