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토마스 홉스, 1651년)이란 유명한 말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로 패러디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나’를 들여다보는 시선이 무수하다. 불신의 확대재생산이 시민의 생각들을 시나브로 바꾼다. 이런 흉포(凶暴)의 상황들이 이미 우리의 생존조건 또는 생활의 환경이 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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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옵티콘 원리를 적용한 쿠바의 프레시도 모델로 감옥 내부 모습. 위키피디아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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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한 장면. 범죄예측으로 범죄(예상)자를 체포해 처벌한다는 이 스토리의 배경도 판옵티콘과 같은 감시체계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보이지 않는 감시자가 한 눈에 모든(많은) 죄수를 감시하는 감옥(監獄)을 말하는 것이다. 감옥의 ‘監’자 또한 ‘보다’라는 말이니, 감옥은 (죄수를) 감시하는 것이 본령이다. 교도소(矯導所)는 감옥의 정치적인 명명(命名)이 행정상의 이름이 된 경우다. 당초 병원의 설계를 위한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환자를 관찰하기 쉬우면서 일반인 또는 의료진과의 효과적인 격리(隔離)를 위한 디자인이었다는 것이다. 1772년 파리시립병원의 대화재 참사가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러다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시스템이 됐다는 것이다.
높고 어두운 감시탑의 감시자는 한눈에 환하고 투명한 감방 모두를 볼 수 있는 구조다. 당연히 죄수들은 감시자를 볼 수 없다. 일방적인 시선만 존재하는 것이다. 바라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분리되는 상황이 지어지는 것이다. 탑에 감시자가 없더라도 죄수들은 그것을 알 수 없다. 학창시절 시험감독 선생님의 짙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떠올리는 이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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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모니터는 사람의 혼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인가? 생각은 없고 오직 검색만이 삶(지식)의 방식이 되고 있는 것 같은 오늘의 모습을 걱정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권력과 형벌제도에 관해 쓴 ‘감시와 처벌’(1975년)에서 이 감시 시스템을 ‘권력의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행사 방식’으로 분석한다. 말하자면 감옥(징벌)의 정치경제학이라고나 할까. 컴퓨터와 정보기술의 놀라운 발달 이전에 푸코는 이미 세상 모두가 판옵티콘 체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임을 내다봤다.
중앙의 감시자는 피감시자(죄수)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료 또는 조력자까지도 감시한다. 중앙의 감시자(의 실체)가 누구인지를 동료나 조력자마저도 모르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런 ‘원리’는 현대의 경영이론과도 결탁하여 노동현장을 감시하기도 하고 군사작전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교육현장인 교실 등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사회는 그 만연(蔓延)한 감시에 대응하는 심리로 무장했다. 이런 조바심은 제2의 원초적 본능이 됐다. 1949년에 지어진 소설 ‘1984년’은 판옵티콘의 이치가 절대권력의 도구로 작용하는 ‘미래세계’를 그렸다. 대형(大兄)쯤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빅브라더’의 감시는 육체적 자유는 물론이고 인간의 사고나 감정까지도 지배한다. 숨이 막힐 것 같다.
빅브라더의 의도에 맞게 과거를 (재)해석하는 부서의 이름은 진실성(眞實省)이다. 그 ‘해석’은 실제로는 날조(捏造)일 터다. 감옥을 관장하는 부서는 애정성(愛情省)이다. 빅브라더를 사랑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사는 인간의 황폐를 내다본 스토리텔링이다.
그 ‘예언’의 빅브라더는 이제 자본주의, 즉 ‘돈’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경제성 효율성의 자본주의 원리와 판옵티콘의 기능은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급기야 인간은 인간성 대신 스마트폰의 지령(指令)에 따라 오로지 ‘검색’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는 황폐함에 젖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검색 대신 명상(瞑想)의 자신을 되찾자는 외침은 편리함 속에 함몰돼 가고.
그 스마트폰이 판옵티콘 또는 빅브라더의 혼령(魂靈)이나 상징은 아닌지 문득 저어한다. 폰을 스마트하게 하기 위해 인간은 하릴없이 모니터와 손가락질에 빠져든다. 영상(映像), 즉 허망한 그림자를 스스로의 모습으로 착각한다. 검색 대신 생각을 회복(回復)한 ‘사람’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날로 절실하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 사족(蛇足)
동양의 고전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나오는 개념인 신독(愼獨)은 어쩌면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 시대에 첨단 판옵티콘 감시의 그늘에 사는 우리에게 큰 통찰일 수 있겠다.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서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은 유교 4대 경전의 하나인 ‘대학’이 설명하는 ‘신독’의 뜻이다.
“소인이 한가로우면 못하는 나쁜 짓이 없는 상태에 이른다. 그러다 군자를 대하면 겸연쩍어 자신의 악행(惡行)을 숨기고 선행을 드러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마치 간과 폐를 들여다보듯 다 훤히 들여다보니,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심(內心)이 성실해야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군자는 신독, 즉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혼자 있으면서도 온 세계가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는 이제 새로운 마음자리가 필요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의 시대엔 홀로 앉아서도 의연(毅然)하고 정중(鄭重)하며 경건(敬虔)한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겠다는 얘기다. 삼빡한 재미 좇다 패가망신한 경우는 그 옛적에도 없지 않았겠다. 신독이 사(士) 즉 선비의 행동강령처럼 여겨진 연유일 터.
동양의 고전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나오는 개념인 신독(愼獨)은 어쩌면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 시대에 첨단 판옵티콘 감시의 그늘에 사는 우리에게 큰 통찰일 수 있겠다.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서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은 유교 4대 경전의 하나인 ‘대학’이 설명하는 ‘신독’의 뜻이다.
“소인이 한가로우면 못하는 나쁜 짓이 없는 상태에 이른다. 그러다 군자를 대하면 겸연쩍어 자신의 악행(惡行)을 숨기고 선행을 드러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마치 간과 폐를 들여다보듯 다 훤히 들여다보니,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심(內心)이 성실해야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군자는 신독, 즉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혼자 있으면서도 온 세계가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는 이제 새로운 마음자리가 필요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의 시대엔 홀로 앉아서도 의연(毅然)하고 정중(鄭重)하며 경건(敬虔)한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겠다는 얘기다. 삼빡한 재미 좇다 패가망신한 경우는 그 옛적에도 없지 않았겠다. 신독이 사(士) 즉 선비의 행동강령처럼 여겨진 연유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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