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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초심으로 돌아가는 수단”

입력 : 2015-08-23 23:14:10 수정 : 2015-08-23 23: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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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40주년 연극 ‘에쿠우스’ 주역 맡은 안석환·남윤호 “‘에쿠우스’가 40년째 무대에 오르는 건 이야기의 깊이 때문입니다. 가볍고 말랑한 이야기는 유행이 금방 갈려요. ‘에쿠우스’는 인간 본연의 모습, 진리에 가까운 깊이까지 내려가요. 언제 공연하든 와닿는 게 있는 거죠. 고전의 힘은 여기에 있어요.”(배우 안석환)

배우 안석환(왼쪽)과 남윤호가 연극 ‘에쿠우스’ 한국 초연 40주년 기념 공연에서 주역으로 호흡을 맞춘다.
이제원 기자
연극 ‘에쿠우스’가 올해로 한국 초연 40주년을 맞았다. 피터 섀퍼가 쓴 ‘에쿠우스’는 1975년 극단 실험극장 개관작으로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작품의 큰 줄기는 정신과 의사 마틴이 쇠꼬챙이로 말 일곱 마리의 눈을 찌른 소년 앨런을 진찰하는 내용이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속에 욕망과 억압, 원시와 문명, 신과 섹스를 다룬다. 이 작품은 숱한 배우에게 도전욕을 불러일으켰다. 올해 40주년 기념 공연에서는 배우 안석환(56)과 남윤호(31)가 각각 마틴과 앨런으로 손잡았다. 공연은 내달 4일부터 11월1일까지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 무대에 오른다.작품을 색상으로 구분한다는 안석환은 ‘에쿠우스’에 대해 “아주 짙은 흑색”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은 어렵고 심오하다고 말해지지만 연기는 아주 쉽게 표현하려 한다”며 “연기는 하는 게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기에 관객이 어려워 못 보겠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작품에서 소년은 말을 신처럼 절실히 사랑합니다. 그렇기에 말과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섹스처럼 느껴져요. 교감의 순간, 소년은 삶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태워요. 마틴은 자신이 갖지 못한 그 열정을 부러워하는데 정작 소년을 정신병자로 치료해야 하는 게 현실이죠. 그는 이런 부조리함을 안타까워해요.”

남윤호는 “앨런은 날 것의 가식 없는 열정을 가졌다”며 “앨런의 순수한 감정과 열정이 남들 눈에는 미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30대인 제가 10대를 연기하지만, 앨런의 진심을 무대 위로 끌어내면 나이는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안석환과 남윤호는 연극계에서 까마득한 선후배 사이다. 1987년 데뷔한 안석환은 28년간 무대에 섰다. 남윤호는 올해 데뷔 3년차인 신예다. 지난봄 예술의전당이 기획한 연극 ‘페리클레스’ 주연을 맡으며 이름을 알렸다. 더불어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부자관계라는 점도 이목을 끌었다. 남윤호는 예명이다. ‘아버지의 그늘’ 밖에서 활동하길 원하는 그는 가족 관계를 잘 밝히지 않는다. 이날 남윤호의 내력을 처음 들은 안석환은 “윤호를 보면 내가 저 나이 때 어땠나 돌이켜보게 된다”고 말했다.

“정말 어려웠고 비겁한 나이였어요. 인생이 안 풀리니 사람이 다급하고 치졸해지고 비겁해지지 않았나. 그때 저는 ‘주인공 외 다수’ 역이었어요. 3년 후부터 번듯한 주인공을 했죠. 그런데 윤호는 벌써 포스터에 자기 이름을 올리잖아요. 대견스러워요.”

“선생님과 연습하면서 받는 에너지가 정말 많아요. 역할에 대한 선생님의 조언을 듣다 보면 ‘배우가 저 정도 분석과 해석을 갖고 연기해야 하는구나’ 싶을 때가 많아요. 지금도 방송·영화보다 연극에 열정을 가진 모습을 보면 나도 저 나이에 후배들이 저렇게 볼 배우가 되면 좋겠다 생각하죠.”(남윤호)

안석환은 방송과 영화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매년 어김없이 연극 무대에 오른다. 그는 “20대에 회사 생활을 하다 때려치우고 연기를 선택한 이유는 삶에 대한 열정 때문”이라며 “연극은 초심으로 돌아가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다른 걸 하면 돈도 많이 벌고 사람들이 ‘와’하고 알아봐요. 그렇지만 내면이 텅텅 비는 걸 느껴봤어요. 강냉이 먹은 것처럼 허하죠. 연극이 제게 주는 게 많아요. 느림의 미학을 배우고, 다른 생각을 갖게 돼요. 연극은 표피적이고 값싼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벗어나 있으니까요. 고향 같고, 정신을 살찌우는 장르죠.”

남윤호 역시 영상 매체의 문을 두드리기보다 무대를 택한 데 대해 “연극은 연기의 본질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무대에서 배우 고유의 연기가 나오고, 이 에너지들이 시간이 갈수록 쌓이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평생 연기하고 싶기에 기초를 탄탄히 하길 원한다.“무대에서 상대 배우와 소통·공감하고 관객과 호흡하는 시간이 좋아요. 연극의 가장 큰 장점은 매일매일이 다르다는 거예요. 영화처럼 늘 같은 필름을 상영하는 게 아니라서 매력이 큽니다.”

그는 매력이라고 말하지만, 일회적이고 재연 불가능한 공연의 숙명은 때로 가혹하게 느껴진다. 오늘 아무리 명연기를 해도 시간 속에 묻히기 때문이다. 안석환은 그러나 “영화처럼 영원히 남겨지는 건 장점이자 단점”이라며 “예술도 유행이 있기에, 지금 보면 멋있는 연기도 20년 지나면 촌스러워진다”고 말했다.

“삶도 그래요. 안석환이란 이름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게 좋을까 고민한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요. 3일만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진리 이외에는 모두 잊혀지고 변해요.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인데, 과연 진리가 있을까요. 물은 아래로 흐른다지만, 중력도 지구도 영원하지 않잖아요. 그렇게 보면 진리가 뭔지 애매모호해요. 그러므로 잊혀지는 게 낫죠. 살아있는 동안 삶에 충실하면 됩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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