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0세기 미국 여성 영웅'인 켈시 박사가 캐나다 온타리오의 딸 집에서 10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1914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켈시 박사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60년부터 FDA에서 신약 허가 신청서를 평가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그해 9월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첫 신청서가 바로 미국 제품명 '케바돈'이었던 진정제 탈리도마이드였다.
1953년 옛 서독의 제약사 그루넨탈이 개발한 이 약은 이미 탁월한 수면진정 효과가 있는 약으로 알려지며 1957년부터 유럽에서 널리 팔리고 있었다. 임신부의 입덧 방지제로도 처방됐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 시판되고 있는 약품인 만큼 허가는 단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켈시 박사는 허가 신청서에 쉽게 도장을 찍어주는 대신 미국 내 제조사인 윌리엄 S. 머렐 사(社)에 신청서를 돌려보냈다. 회사 측이 제출한 자료가 부족하다며, 약품의 독성과 효과 등에 대한 추가 정보를 요구한 것이다.
추가 자료 요구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허가는 떼어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이미 창고에 탈리도마이드를 가득 비축해뒀던 머렐 사는 전방위 로비를 펼치며 켈시 박사를 압박했다. FDA 고위층에게 켈시 박사가 "까다롭고, 고집 많고, 비합리적인 관료"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켈시 박사가 이러한 압박에도 꿈쩍하지 않는 사이 이듬해 2월 영국의학저널에는 탈리도마이드가 팔, 다리 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글이 실렸고, 6개월 후 유럽에서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 출산을 유발한다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약품은 곧바로 전면 회수됐지만, 그때까지 임신부의 탈리도마이드 복용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팔, 다리가 없거나 눈과 귀가 변형된 채로 태어난 기형아는 1만2천 명에 달했다.
그러나 켈시 박사가 쉽게 시판 허가를 내주지 않은 탓에 미국에서 태어난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는 17명에 그쳤다. 머렐 사가 허가 이전에 1천 명의 미국 의사들한테 연구 목적으로 나눠준 샘플로 인한 피해였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이 전 세계를 뒤흔든 후 곧바로 워싱턴포스트는 켈시 박사를 영웅으로 치켜세운 기사를 실었다.
켈시 박사는 자신만의 공은 아니라고 겸손해 했지만, 그녀는 곧장 소신을 지킨 강직한 공무원의 표상으로 부상하며 미국 전역의 스타가 됐다.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은 "신약의 안전성에 대한 켈시 박사의 탁월한 판단력으로 미국내 기형아 탄생이라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며 공무원에게 주는 최고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다소 허술했던 미국의 의약품 허가 제도도 켈시 박사 덕분에 한층 강화됐다.
NYT는 "켈시 박사는 기형아 출산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의약품 규제 법률의 길을 열어줬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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