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화장한 눈매, 살짝 드러난 여인의 장딴지, 몽상으로 가득한 안개 낀 평원 앞에 잠시 멈추는 것. 풀밭에 앉아 코로 바람을 마시며, 빵과 치즈 한 조각을 먹는 것. 걷는 일이야말로 이런 것들을 하기에 더없이 적합하지 않은가?… 내 박물관은 길들과 거기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고, 마을의 광장이며, 모르는 사람들과 식탁에 마주 앉아 마시는 수프인 것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효형출판) 중에서
은퇴 후 남들이 흔히 그러하듯 벽난로 앞에 앉아 책을 보고 정원의 꽃을 가꾸는 노년의 삶 대신 ‘걷기’를 시작한 한 남자가 있었다. 그것도 집 앞의 공원 산책 같은 한가한 걷기가 아니라,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까지, 즉 실크로드의 끝에서 끝까지 건너가는 무모한 걷기였다.
전직 기자였던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몇 년에 걸쳐 2만3000㎞씩을 나누어 실크로드를 걸었고, 그 여정에서 만난 길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문명이 넘나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엄청난 역사가 흘렀으나 이제는 흔적만 남은 그 길을 육십 줄의 한 여행자가 고독하게 걸어가며 남은 인생의 새로운 기록을 썼던 여정을, 나는 몇 년 전 버스를 타고 잠시나마 따라가 보았다.
국내 여행 경험이라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랑을 하고 다니지만, 해외여행은 그냥 시간과 돈이 허락되는 범위에서 몇 군데 다녀본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그리스와 터키에 대해 무척 잘 아는 선배와 이야기하다 언젠가 지중해 여행을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고, 서로 시간이 맞아서 결행하게 되었다.
다만 당시에도 그리스는 여행하기에 여건이 별로 좋지 않아 일단 터키만 가기로 하고, 우리는 여행 방법 중 가장 싸고 편리한 방법인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다. 그런데 우리의 의지로 일정과 방법을 결정할 수 없는 여행인지라, 비행기를 타고 가는 과정부터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터키까지 가는 항로는 우즈베키스탄을 경유해야 했는데, 새벽에 느닷없이 비행기에서 내려 무척 좁고 오래 된 타슈켄트 공항 대합실에서 다섯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날을 새고 이스탄불 공항에 해가 거의 중천에 뜬 늦은 오전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관광버스에 실려 몽롱한 정신으로 이스탄불의 여러 명소를 시설 점검하는 느낌으로 훌쩍 훌쩍 넘어 다녔다.
이후 빡빡하게 짜인 스케줄대로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감상을 억제하며 돌아다녔는데, 꼭 시험을 앞둔 벼락치기 공부 같았다. 몇 시간씩 버스를 타고 가이드의 설명을 흘려들으며 졸다가 잠깐 내려주는 대로 먹고, 보여주는 대로 보면서 다녔다.
그러면서 참 많이도 봤다.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을 이으며,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이슬람 문화의 수많은 역사 속 이야기를 간직한 터키에서, 우리는 궁전을 보았고 지하도시를 보았고 석굴주거를 보았고 그리스의 고대도시를 보았다. 그리고 버스 창밖으로 드문드문 한 그루씩 나무가 나타나는 평원과 멀리 석회의 흰 빛이 어른거리는 먼 산들과 한낮의 카페에 앉아 크게 손짓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중년의 터키인들이 쉴 새 없이 스쳐갔다.
그런데 문제는 패키지여행이 다 그렇긴 하지만, 중요한 유적은 아주 짧은 시간을 주며 빨리 보고 오라고 재촉하면서, 관광객을 반기는 쇼핑센터에 무척 많은 시간을 할애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만난 건물이 바로 ‘카라반사라이’였다.
# 대상들의 오아시스이자 휴게소, 카라반사라이
7박8일 빡빡한 여정의 중간쯤이었을 것이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며 여러 가지 유적을 보던 일정에서 이날은 먼 거리를 움직인다고 했다. 그리고 망망한 초원을 계속 달리던 중 잠시 휴게소에서 쉬겠다고 하며 버스가 멈췄다. 그리고 평범한 휴게소 옆에 보이는 범상치 않은 석조 건물이 카라반의 휴게소인 ‘카라반사라이(caravan sarai)’라는 이야기를 가이드가 지나가는 말투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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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반사라이 전경 ‘술탄 한’이라는 이름의 카라반사라이. 터키에서 가장 큰 카라반사라이라고 한다. |
카라반(caravan)은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사막을 건너다니며 교역을 하던 대상(隊商)을 뜻하는 말이고, 카라반사라이는 그 상인들을 위한 휴게소이다. 카라반사라이는 단순히 카라반들이 쉬어가는 장소만이 아니라, 인근 각지의 카라반들이 서로 만나 문물을 교환하기도 하고, 세금을 걷기도 하고, 식량과 물 같은 생필품을 사고파는 교역소이기도 했다.
낙타의 등에 실려 있는 값이 많이 나가는 물건들을 노리는 도둑들을 경계하며 태양이 내리쬐는 먼 길을 가던 상인들이 한시도 내려놓지 못하는 긴장을 잠시 늦출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말하자면 카라반사라이는 팍팍한 사막이나 초원 한가운데 불현듯 나타나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오아시스라는 말은 그들에겐 천국보다 더한 안식과 평화를 상징하는 말이고, 사막에서 사람들을 살려주는 곳이자 이상향 같은 곳이다. 모래와 바람만 있을 뿐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사막이 지옥이라면 오아시스는 천국이다.
그 동네에서 캐낸 돌을 다듬고 조각을 해서 세운 장방형의 성채는 들어가는 문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정면에 파슈타끄(pishtaq)라고 불리는 장식벽이 있는 13m 높이의 돌출 게이트가 있다. 그 문은 이슬람 특유의 반복적이며 유려한 조각이 촘촘히 새겨져 있는 뾰족아치(pointed arch)로 되어 있었다. 네모나고 무덤덤해서 무척 기능적으로 보이는 그 건물에 유려한 장식이 들어가 있는 문은 마치 무뚝뚝한 사람의 얼굴에 표정을 그려 넣은 듯 약간은 이질적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무척 화려해 보였다.
문을 들어서니, 안으로 깊은 길쭉한 마당이 나오고 마당 주변으로 회랑이 드리워져 있었다. 건물은 단층건물이었으나 천장은 무척 높았다. 수백 명의 대상이 일시에 머물러야 했던 그 공간은 무척 넓었고, 사방에 높은 벽과 망루에 에워싸여 무척 안온했다. 넓지만 안온한 그 느낌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화려한 뾰족아치의 문들이 연속된 왼쪽 벽면과 원만한 곡선의 아치로 된 아케이드가 있는 오른쪽 벽면이었다.
마주보는 두 벽면에 다른 느낌의 문과 아케이드를 만들어 대칭이면서 비대칭인 마당을 만들어, 그로 인해 마당은 무척 동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슬람 문화의 반복적이고 엄정한 질서를 가지면서도 동적인 느낌을 주는 요체가 바로 이와 같은 적당한 파격에서 생기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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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반사라이 모스크 마당의 정점에 섬처럼 가운데 우뚝 솟은 작은 이슬람의 기도처인 모스크가 있다. 사각형의 키오스크-모스크는 터키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
워낙 급하게 둘러보느라 사진 찍기에 급급해서 당시에는 건물을 차분히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시간에 맞춰 버스에 다시 올라타 달리는데 고속도로 중간중간 한 번씩 각각 다른 양식의 카라반사라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 천년의 시간을 담은 문명의 흔적
여행에서 돌아와 찾아보니 우리가 들렀던 술탄 한(Sultan Han)이라는 이름의 카라반사라이는 13세기 셀주크 투르크 시대에 지어진 것이었다. 술탄 한은 1229년에 시리아 건축가 무함마드 이븐 칼완 알 디마슈끼(Muhammad ibn Khalwan al-Dimashqi)에 의해 지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화재로 인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으나 1278년 복원 및 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콘야(Konya) 서쪽, 악사라이(Aksaray) 지방에서 페르시아로 향하는 교역로 중간에 지어진 것으로 터키에서 가장 큰 카라반사라이라고 한다. 콘야 지역은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240여㎞ 남쪽에 위치해 있고 아나톨리아 지역을 대표하는 고도다. 12∼13세기에는 셀주크 투르크의 수도로서 번영하였으며,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술탄 한을 비롯해 콘야의 셀주크 궁전 등 많은 건축 유산을 남긴 사람은 셀주크 투르크 시대의 위대한 왕으로 불린 술탄 케이쿠바드(Kayquba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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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반사라이 숙소 좁은 입구들이 늘어선 곳에는 관리실, 객실, 주방, 욕실 등 서비스 기능을 하는 공간들이 있다. |
“고대 오리엔트 문명의 창조자들에서 그리스·로마제국, 페르시아제국에서 이슬람제국, 선진(先秦)시대의 중국부터 몽골제국, 석가시대의 인도에서 티무르제국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북방 유목민족들의 흥망에서부터 중앙아시아제국들의 출몰(出沒)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모든 역사적 사변은 모두 실크로드를 따라 전개되고, 또 이 길에 의해 서로 연계되고 관련됨으로써 비로소 모든 변화와 발달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사전’(창비) 중에서
그 무렵 나라의 기틀이 형성되기 시작한 터키는 중국으로부터 오는 육상 실크로드의 종착점이자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가는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다. 그런 터키에서도 아나톨리아(Anatolia) 지방은 지정학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실크로드의 3대 간선, 특히 오아시스로 이곳을 경유해 유럽(로마)에 이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은 동서 교류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기원전 8∼7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까지 이용되었던 실크로드는 근대적인 교통수단이 등장하고 근대적인 민족국가들이 대두되면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실크로드는 모두 알다시피 중국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를 지나 터키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까지 연결되는 대장정으로, 총 길이가 1만2000㎞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거리가 극점에서 적도까지의 길이보다 2000㎞가 더 길다. 그 막막한 길을 오가던 대상들이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는 20∼40㎞ 정도였다고 한다. 카라반사라이는 대상들의 하루 혹은 한나절 이동거리에 맞춰 만들어졌다.
사막을 건너고 초원을 건너며 동양과 서양의 문화와 문명을 실어 나르던 실크로드는 대상들의 운반량의 몇 배에 달하는 새로운 운송수단에 의해 폐기되었다. 그러나 실크로드는 사라졌지만 실크로드라는 길이 상징하는 문명의 교류라는 정신은 살아 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흘린 빵조각처럼 점점이 남아 있는 카라반사라이로 인해서, 그 정신이 기록되고 단지 역사 속의 사실이 아니라 직접 보고 만져볼 수 있는 실체로서의 실크로드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공동저자 임형남·노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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