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빚어 병의 모습을 만드는 도공의 작업이 거침없다. 원형의 모습을 얼추 갖추자 몸통 부분을 두들겨 평평한 면을 만들었다. 재고 따지는 섬세한 손길은 아니다. 얼핏 보면 병은 일그러진 듯도 하다. 무늬를 새기는 작업이 남았다. 이 또한 망설임이 없다. 몸체에 거칠게 선을 그어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하나하나 무늬를 새겼다. 도공의 손길이 멈추면 물고기가 놀고, 모란과 연꽃이 만개했다. 대를 이어온 재주이고, 스스로 수십년을 작업하며 얻은 성과가 빚은 결과다. 분청사기 편병을 보며 떠올려 본 상상이다. 분청사기 편병은 굽에서부터 주둥이까지 물레질로 병 모양을 만든 뒤 몸체의 앞뒤를 두들기거나 눌러 납작하게 만든다. 누름의 정도에 따라 편병은 둥근 것, 길쭉한 것, 네모난 것, 뾰족한 것 등 형태가 다양하다. 자유분방함은 전체를 감싼 무늬에서 더 두드러진다.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듯한데 격조가 느껴진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10월31일까지 열리는 기획특별전 ‘선과 면의 만남, 편병’이 보여주는 분청사기 편병의 매력이다.
15세기 작품인 ‘분청사기 박지연어문 편병’(국보 179호)은 분청사기 편병을 대표하는 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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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몸통에 활기찬 선으로 물고기 무늬를 장식했다. ‘출세’를 상징하는 물고기 무늬를 새긴 사례가 드물어 가치가 높다. 호림박물관 제공 |
손길 가는 대로 그려낸 활기찬 선이 물고기에 생동감을 준다. 측면에는 꽃 무늬를 거칠게 그렸다. 이처럼 자유롭고 파격적인 기법의 편병은 주로 전라도 지역의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물고기는 출세의 상징으로 인식됐다”며 “많게는 세 마리가 그려진다. 물고기 무늬의 편병이 적기 때문에 물고기 한 마리가 추가되면 가격이 수천만원씩 올라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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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박지연어문 편병 |
박물관은 “도자편병은 조선 초 분청사기에서 가장 먼저 확인된다”며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기법으로 자유롭게 표현한 문양은 질박한 형태와 조화를 이룬다”고 소개했다.
분청사기 편병으로 꾸민 1전시실을 지나 2전시실로 들어서면 같은 형태지만 전혀 다른 맛을 보이는 백자 편병을 만나게 된다.
백자 편병은 단정함과 무게감이 두드러진다. 주로 경기도 광주의 관요(官窯)에서 생산된 것인데, 왕실이나 관청에서 주로 써 형식적으로 엄격하다. 지방의 가마에서 만들어져 주로 현지에서 사용되던 분청사기와는 태생적으로 다른 면모를 가진다.
15∼16세기 작품인 백자 편병은 키가 30㎝ 정도가 돼 드물게 보이는 대형 작품이다. 앞뒷면이 완만하게 부푼 원형의 몸통은 고고한 인상을 준다. 이 편병의 몸통은 따로 만든 원반 두 개를 붙여서 만든 것이다.
‘백자 철화국죽문 편병’은 17세기 작품이다. 몸통 앞면에 철사안료로 대나무와 국화를 솜씨 좋게 그려놓았다.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시원한 대나무, 국화 문양이 흰 바탕과 조화를 이뤄 인상적이다. 사군자 계열의 무늬가 철화기법으로 꾸며진 편병은 경기도 광주에서 17세기 운영된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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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자 음각용문 편병 |
박물관 관계자는 “특별전에 출품된 70여점 중 절반 가까이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라며 “조선시대 편병이 심플함을 강조하는 현대의 디자인 트렌드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데 주목했다. 미술 조형의 기본 요소인 선과 면의 어울림을 편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회 문의는 (02)541-3523.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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