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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디스토피아

입력 : 2015-06-09 20:49:12 수정 : 2015-06-09 20: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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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탐욕이 부른 참상 위에 희망을 세우다
‘매드 맥스’(Mad Max)라는 영화가 오랜만에 다시 만들어졌다. 1979년에 처음 나와 몇 번 속편이 만들어 졌지만 이미 아득한 과거의 일이었고, 그 영화는 전설로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시리즈를 처음 만든 조지 밀러(George Miller, 1945∼) 감독이 일흔의 고령으로 다시 만들었다고 해서 개봉 초기부터 크게 화제가 되었다. 또한 영화적인 완성도나 액션의 박진감이 전편에 못지않다는 이야기에 솔깃하여 보러 가게 되었다.

독일의 베를린 쿠담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는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조부를 기념하기 위해 1890년대에 지어졌는데, 1943년에 폭격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분노의 도로’라는 부제가 붙은 2015년작 ‘매드 맥스’는 핵전쟁으로 사막이 되어버린 지구의 22세기 모습을 그린 영화다. 방사능에 노출된 인류는 대부분 완전치 않은 육체를 가졌고, 물과 기름을 가진 자가 지배자가 되고 8기통 엔진이 숭배되는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자원이 고갈되고 모든 땅이 황폐한 사막으로 변해버린 황무지에서 낡고 이상하게 개조된 자동차들이 마치 로마시대 전차군단처럼 등장해서 아주 원시적인 전투를 벌인다.

영화 내내 잠시도 숨을 돌릴 수 없어 혹자는 기승전결이 아닌 ‘승’만 있는 전개라고도 한다. 정신이 팔려서 보고 있노라니 영화는 끝이 나고, 마지막에 어떤 사람의 독백이 흘러간다.

“희망 없는 세상을 떠돌고 있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우리의 미래는 어디인가.”

1968년에 만들어진 ‘혹성탈출’(Monkey Planet , Planet of The Apes) 또한 굉장히 충격적인 영화였다. 지구를 떠난 우주선이 우주를 떠돌다가 수백 광년이 떨어진 어떤 행성에 불시착하여 벌어지는 일에 대한 내용이고, 찰턴 헤스턴이라는 강인하게 생긴 배우가 나온다. 그 행성에는 미개한 인간들과 지능이 발달한 원숭이들이 산다. 테일러 선장(찰턴 헤스턴)은 그 행성을 지배하는 원숭이들에게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다. 밤새워 달리다 어느 바닷가를 지나게 되는데, 모래사장에 무언가가 처박혀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머리와 팔 부분만 남겨진 채 모래에 비스듬히 파묻힌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엎드려 오열하는 주인공을 비추며 영화는 끝난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고 나머지는 우리의 상상에 맡겨진다. 아마도 그곳은 지구와 멀리 떨어진 행성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미래라는, 아름다운 미래가 아닌 어둡고 좌절만이 남아있는 미래라는 그런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였다.

우리는 미래를 늘 희망과 결부해서 생각하는 오래된 버릇이 있다. 그런데 ‘매드 맥스’나 ‘혹성 탈출’ 같은 공상과학 영화나 소설에서는 줄곧 희망을 잃은 미래를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우리의 미래에 대한 경고를 보내며 자각을 촉구한다. 어두운 미래를 뜻하는 단어인 디스토피아(dystopia)는 유토피아(utopia)의 반대 개념이다. 사실 이상향을 이야기하는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도 세상에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디스토피아는 무척 껄끄럽고 불편한 말이지만, 우리가 곱씹어보아야 할 말이기도 하다.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의 파괴 전 원래 모습.

# “나는 네가 상상도 못할 것을 보았다.”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1982년에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1937∼) 감독이 만든 영화이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얼마 남지 않은 미래인 2019년의 미국 LA이다. 어두운 도시에는 산성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400층이 넘는 건물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나오지만 도시는 음침하다.

사람들은 환경 파괴와 인구 증가로 인해 지구를 떠나 식민지 행성을 개척하러 우주로 나갔다. 허공에는 건물마다 대형 스크린들이 매달려있고, 그 안에서는 화사한 얼굴의 여자가 무언가 달콤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배경이 되어주는 어두운 도시와는 매우 부조화된, 생경한 대조를 보여준다. 인간이 노동력을 제공받고 전쟁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만든 복제인간 리플리컨트(Replicants)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지구로 잠입한다. 그들은 도시에서 잠행하며 4년 시한인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인간들이 심어놓은 기억으로 존재하지만, 인간과 똑같이 느끼고 감동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린다. ‘블레이드 러너’라고 불리는 특수경찰이 그들을 찾아서 ‘처리’하는데, 그것을 사형집행(execution)이 아니라 해고(retirement)라며 합리화한다.

나는 그 영화가 만들어진 지 10여 년 후 우리나라에서 개봉했을 때 종로에 있는 소극장에서 몇 사람 되지 않는 관객들과 함께 보았다.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영화는 이전에도, 이후로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도 특히 블레이드 러너가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고 특히 건축가들이 열광했던 데는 당시나 지금에 와서 보더라도 막연히 상상했던 미래 도시의 모습을 그럴듯하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수백층의 마천루가 즐비하지만, 거리의 풍경은 사람 사는 모습이란 지금이나 미래나 다를 것 없다는 것을 암시하듯 홍콩이나 일본의 어느 뒷골목처럼 스산하고 끈끈하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공감할 텐데, 수사물처럼 복제인간들을 하나하나 제거해가며 쫓는 인간들보다는 처절하게 쫓기는 복제인간들의 비애와 아픔에 확연하게 마음이 기울게 된다. 그들은 인간이 할 수 없는, 혹은 하기 힘든 일을 해내기 위해 힘이 세거나 뛰어난 지능을 가졌거나 심지어 인간을 ‘위로’하는 능력을 부여받은 대신에 유전자 개량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짧은 수명을 가졌다. 복제인간들이 그 사실을 자각하고 운명을 거부하는 순간, 그들은 제거대상이 된다. 결국 인간은 인간이 이루어낸 불완전한 미래를 스스로 없애야 하는 위기를 맞게 된다는 역설이 거기에 있다.

“난 네가 상상도 못할 것을 봤어. 오리온 전투에 참가했었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봤어. 그 기억이 모두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이렇게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하는 영화나 소설에서 미래는 인류의 양심과 지성보다는 기술과 권력이 중시되는 전체주의적 통제사회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혹은 자멸적 경쟁의 결말로 일어난 핵전쟁으로 인해 문명이 붕괴되어 원시시대로 돌아가기도 하고, 또는 인간이 만든 기계 혹은 기계인간들과 힘들게 경쟁을 하기도 한다. 모두 우리의 잘못된 현대화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

요지는 불행한 미래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아닌 우리 스스로 만들어갈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수천년에 걸쳐서 힘들게 만들어놓은 문명이나 이룩해놓은 인류의 문화가 단 한 차례의 실수로 인해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의 여러 가지 국제정세로 볼 때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진다. 과도한 무기 개발과 군비경쟁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도 파괴력이 강해진 무기 한 방이 잠깐 사이에 상상할 수 없고 상상하기도 싫은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에….
일본의 히로시마 원폭 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파괴되고 남은 원폭 피해의 유적이다.

# 건축, 반복하지 말아야 할 역사를 말하다

기계와 동력의 변환으로 근대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굉장한 기대를 갖게 된다. 모든 것이 과학이나 기술의 진보로 통제 가능해지고, 식량이나 주거에 대한 문제도 대량생산을 통해 해결되어 낙원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건축가이며 현대건축의 골격을 완성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미래의 건축과 도시에 대한 화려한 청사진을 들고 나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잘 정돈되고 자동차와 사람이 조화롭게 다니고, 그 사이에 적당한 양의 수목이 자라고 있는 그런 이상적인 계획을 펼쳐 놓았던 것이다. 그 계획들은 거의 실현되지 않았지만, 간혹 그런 이상을 구현했던 곳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세운상가가 그런 곳 중에 하나였다. 르 코르뷔지에도 하지 못한 것을 우리나라에 직역하여 적용하였으나,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상한 도시의 생물체가 되어 ‘처리’만을 기다리고 있다.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인간은 이전보다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고 이전에는 통제하지 못한 자연을 통제하게 되었지만, 가장 큰 걸림돌인 인간의 욕심은 통제가 불가능해지고 혹은 더욱 탐욕스러워졌다. 식량이 남아돌지만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나고, 텅 빈 집이 늘어나지만 집이 없어 거리를 떠도는 사람이 늘어난다. 그리고 인류를 지키기 위해 발전시키고 만들어지는 하늘의 천둥보다, 거대한 파도보다 더욱 위력이 강한 무기들은 바로 사람들 스스로를 겨누는 흉기가 되고 있다.

벌써 70년 전의 일이 되어버린, 그러나 인류가 영원히 기억하고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어떤 상징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가장 직접적인 계기가 된 히로시마 원폭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있는 원폭 돔(Genbaku Dome)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파괴되고 남은 원폭 피해의 유적이다. 1915년 지어진 원래의 건물은 얀 레첼(Jan Letzel)이 설계했고, 산업 장려 등을 목적으로 한 전시장이자 사무실이었다. 원폭 당시 투하 지점으로부터 580m 거리의 이 건물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고 건물도 부서졌지만 외벽과 골조의 일부가 남았다. 건물 안의 시계는 원자폭탄이 떨어진 8시15분을 가리키며 멈춰 서 있다. 강 건너편에는 피폭자들을 추모하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이 조성되어 다리로 연결되며,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독일의 베를린에도 전쟁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남은 건물이 있다. 쿠담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는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조부를 기념하기 위해 1890년대에 지어졌는데, 1943년에 폭격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113m 높이로 지어졌던 첨탑 일부와 중앙현관, 전쟁 당시 총과 포탄 자국 등이 벽에 남아 전쟁의 참화를 잊지 말라고 이야기해주고 있다. 철과 유리로 된 신관 건물은 1959년에 지어진 것이고, 파손된 첨탑 1층에 기념관이 있다.
강원도 철원의 철원 노동당사는 1946년 초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세운 러시아식 건물로, 폭격으로 바닥이 내려앉아 골격만 힘겹게 서 있다.

철원에도 이와 유사한 전쟁의 유적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발해를 꿈꾸며’의 뮤직 비디오 촬영지로 더 알려진 철원 노동당사 건물이다. 독립 직후 북한 땅이었던 1946년 초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세운 러시아식 건물로, 지상 3층 1850㎡ 규모였으나 폭격으로 바닥이 내려앉아 껍질만 힘겹게 서 있다. 엄숙한 비례와 구조를 통해 당의 권위를 내세웠을 건물의 근처 방공호에는 학살과 고문의 흔적 또한 발견되었다고 한다.

21세기 지구의 한쪽에서는 인터넷망을 기반으로 세계인들이 만나지 않고도 서로 친구가 되고 교류하는데, 한편에서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전쟁이 일어나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거두고 어렵게 이룬 문명의 흔적을 한순간에 파괴한다. 미래와 과거가 공존하는 것이다.

매드 맥스의 황량한 사막이나 블레이드 러너의 껍데기만 화려하나 비어있는 도시 어느 쪽이든 우리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은 아니다. ‘집이자 고향(home)’으로 돌아가고 싶어 모래폭풍 속을 달렸던 매드 맥스의 여전사 퓨리오사처럼,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인간이 가장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희망이 무엇일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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