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은 1923년부터 1929년까지 6년 동안 일본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당시 시대 조건으로나 경제 사정으로 보아도 6년이라는 유학생활은 흔치 않은 긴 기간이었다. 지용은 휘문고보 교비 장학생으로 유학을 가서 가난한 타관살이를 했다. 충북 옥천 산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뛰어난 학업성적을 보였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4년 동안 공백기를 거친 뒤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학비를 낼 형편이 못 되어 사무실 사환으로 일하기도 했던 지용은 이 학교 교주 민영휘의 배려로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떠난 것이다. 교토에서 그가 하숙을 정한 곳은 고도를 가로질러 흐르는 유서 깊은 가모가와(鴨川)변이었다.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정지용 시비에 증보판 정지용전집을 헌정한 최동호 경남대 석좌교수 일행. 왼쪽부터 다케다 유키, 김동희씨, 최 교수, 최세운·송민규씨. |
‘수박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은 불지 않았다. 오렌지 껍질을 씹으며 홀로 앉아 향수를 저작질하는 청년도 보이지 않았다. 기모노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눈에 많이 띄었고 천변에는 제비 대신 남녀 커플이 쌍쌍이 앉아 있다. 천변에 잔디까지 심어놓아 산책길로 손색이 없는 공간이다. 반대편 천변은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이들의 차지다. 90여년 전 조선의 산골에서 태어난 이가 현해탄을 건너와 가난한 유학생으로 살면서 시름을 달래던 흔적은 짐작만 할 뿐이다.
10여년의 각고 끝에 새로 발굴한 자료들을 보강해 정지용 전집을 발간한 뒤 이 책을 헌정하기 위해 교토의 정지용 시비를 찾아간 일행에 합류했다. 최동호 경남대 석좌교수를 포함한 연구진 3명(송민규 김동희 최세운)과 김구슬 시인이 그 일행이다. 이들은 가모가와를 찾기 전 오전에 지용이 다녔던 도시샤대학 교정에 먼저 갔다. 도시샤대 100주년 기념관 뒤편에 자리잡은 이 시비는 2005년 정지용의 옥천 고향 사람들과 기념사업회가 세운 것이다. 시인의 고향에서 가져온 화강암 시비 앞면에는 ‘압천’이 한글과 일어로 함께 새겨져 있다. 시비를 찾아가던 날은 비가 내렸다. 시인의 113번째 생일을 기려 누군가 꽂아놓은 꽃들은 비를 맞아 촉촉이 젖은 채 모로 기울었다. 일행은 시비 앞에 푸른색 표지의 전집 두 권을 나란히 진설하고 시비 뒤로 돌아가 시인의 혼백과 더불어 기념사진을 찍었다. 시비 뒷면에는 ‘정지용 선생은 1902년 대한민국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140여편의 시와 산문을 남겼으며…’로 이어지는 공적을 새겼는데 최 교수 일행의 노고로 무려 137편이 늘어난 279편으로 다시 고쳐 새겨야 할 판이다.
정지용 시인이 교토 유학 시절 하숙했던 가모가와(鴨川)변에 남녀 커플들이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 |
도시샤대학에 가기 전 일행은 지용이 가톨릭 세례를 받은 가와라마치(河原町)성당에 들렀다. 이곳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에서는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앙 제단 뒤편 스테인드글라스를 향해 곧게 뻗은 통로를 꽃으로 장식하는 중이다. 성당 마당에서는 아이보리색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손에 꽂을 들고 화사하게 가족들과 웃고 있다. 지용이 세례를 받았을 당시의 성당은 이미 1967년 나고야의 ‘메이지촌’으로 해체 이전했고 지금은 새로 지은 현대식 공간이다. 지용에게 내내 큰 영향을 미쳤던 가톨릭 신앙이 공식으로 시작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깃든 곳이다.
교토= 글·사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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