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의 투명하고 맑은 애인 희우. 그네는 성민이 감옥에 갇힌 이후 어느 날 편지 한 장 남겨놓고 사라진다. 27년 만에 그네가 다시 나타나 편지로 만날 것을 청하는데, 그네는 이미 난소암 말기 환자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태다. 그네에게는 ‘영서’라는 딸까지 있다. 성민 때문에 잡혀가 성고문을 당한 끝에 잉태한 생명이다. 프랑스로 도망가듯 건너가 한국의 모든 일을 잊고 산부인과 의사로 살던 희우는 왜 다시 옛 애인을 찾는가.
“그리운 당신! 당신을 향한 저의 그리움을 제발 비웃지 마세요. 저도 알고 있어요. 너무나 늦은 그리움임을. 쉰넷의 여자가 쉰여섯의 남자에게 품기에는 너무나 뜨거운 그리움인 것도 알고 있고요. 염치가 없나요?”
그네는 희우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과 절연하고 이 땅을 떠났던 것인데 당도한 죽음이 젊은 ‘희우’를 다시 살려낸 것이다. 정찬은 희우의 몸속에는 ‘죽음이라는 낯선 생명체’가 숨쉬고 있었다고 서술하면서 “새로운 사랑을 하게 한 죽음에 감사한다고 했다”는 희우에게 이런 대사를 떠맡긴다.
“죽음은 저에게 미지의 손님이에요. 전 그 손님을 잘 맞이하고 싶어요.”
이 장편은 가까운 한국 현대사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는 유용한 자료 구실도 한다. 유신시대와 광주항쟁을 거쳐 현실사회주의 붕괴로 이어지는 생생한 과거가 구체적인 자료를 동반한 ‘밤의 강물’로 흘러간다. 그 강물 위로 정찬은 “삶과 죽음 사이, 나비의 날개처럼 얇은 그 사이, 너무나 얇아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허망한 곳”을 투명하게 응시하고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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