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開昨夜雨(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花落今朝風(오늘 아침 바람에 지고 있네)
可憐一春事 (가련토다 한낱 봄날의 일이라니)
往來風雨中 (비와 바람 사이에 오가는구나)
-송한필의 시, ‘우음(偶吟)’
花落今朝風(오늘 아침 바람에 지고 있네)
可憐一春事 (가련토다 한낱 봄날의 일이라니)
往來風雨中 (비와 바람 사이에 오가는구나)
-송한필의 시, ‘우음(偶吟)’
#꽃이 피고 지듯 인물도 피고 지다
이 시의 제목인 우음(偶吟)이란 ‘우연히 읊는다’라는 뜻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송한필(宋翰弼)이라는 사람이 지은 시라고 하는데, 나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내가 처음으로 외우게 된 시이기도 하다. 그 시를 좋아해서이거나, 그 시에 큰 의미를 부여해서 외운 것도 아니고 순전히 ‘우연’으로 인해서였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흔히 벌어지는 ‘환경미화 배틀’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반마다 여러 가지 액자나 조형물을 차출하는 과정에서 어떤 학부모가 기증한 두 개의 액자가 우리 교실 벽과 창문 사이에 끼여 있던 기둥에 걸렸다. 하나는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리고 좀 생급스러운 시화가 곁들여져 아주 조야한 느낌이 들었던 시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한문으로 적혀 있었고 그 옆에 ‘화개작야우 화락금조풍…’ 하는 훈이 달리고 한글로 해석이 곁들여진 액자였는데, 너무 고전적 느낌을 주다 보니 민속주점 벽지 같은 느낌이었다. 그 시들에 대해 사실 아무런 관심이나 애정도 없었지만 지루한 수업시간에 고개를 돌리고 읽다 보니 어느덧 외우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조지훈의 ‘낙화’와 송한필의 ‘우음’이었다.
조지훈에 대해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청록파, 승무 등이 교과서에 나오면서 알게 되었으나, 송한필에 대해서는 그 후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또한 전혀 알고자 하는 욕구도 없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후에야 송한필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 시가 무척 의미가 깊은 시였음도 알게 되었다. 그를 알고 다시 그의 시를 읽으며 나는 깊은 물속으로 한없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송한필은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이다. 그의 형 송익필과 더불어 율곡 이이가 성리학을 논할 수 있는 두 사람으로 지목할 정도의 깊은 학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참 극적이었다. 부친인 송사련은 사림의 숙청에 앞장서 출세했던 사람이다. 아버지의 행적으로 인해, 송한필이 태어날 당시에는 무척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외증조모가 천출이었다는 신분적인 제약으로 인해 평생 벼슬을 하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서 학문을 익히고 제자를 길렀다. 말년에는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도망을 다니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런 곡절 많은 자신의 일생을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면서 우연히 읊었을 것이라는 정황을 떠올리니 마음이 참 무거웠다.
율곡 이이의 말마따나 송한필, 송익필 두 형제의 학문은 대단했고 특히 송한필의 형인 송익필은 아주 높고도 깊은 학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가 키워낸 제자가 바로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사계 김장생이다. 조선후기를 지배했던, 엄격한 위계와 계급적 질서에 충실했던 예학이 ‘천출’인 송익필에 의해 열렸다는 것은 정말로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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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강경읍의 임이정, 예학의 종장 김장생이 추구하는 삶과 닮은 집이다. 밖에서는 잘 모르지만 높지도 않은 마루에 앉으면, 아래로 금강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호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대로 조광조 등 신진사류가 훈구파에 의해 숙청되었던 기묘사화 2년 후 또다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난다. 사림 세력을 제거한 심정·남곤 등이 안당, 안처겸 등 사림 세력을 무고한 사건인데, 그 주동자가 바로 송익필 형제의 부친인 송사련이다.
송사련은 사실 안처겸과는 친인척 간이었다. 송익필의 할머니 감정이 안돈후의 천첩이었던 중금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안돈후의 아들이자 우의정을 지낸 안당은 송사련의 외삼촌이고, 안당의 아들인 안처겸은 외사촌이었던 셈이다. 그의 출신에 대한 열등감이 추악한 욕망과 만나 안처겸 일가의 반대편에 서서 일생 영화를 누렸으나 그 오명은 자식들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나중에 안처겸의 후손들이 송사를 일으켜, 역모가 조작된 사건임이 밝혀지고 송익필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사노비였음이 드러난다. 졸지에 사노비로 환속된 송익필은 성씨와 이름을 바꾸어 몸을 피한다. 이후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 이호·백유양 등 1000여명의 동인들이 제거되며 송익필의 형제들은 모두 양반의 신분으로 회복되었다. 당시 이 사건을 맡아 처리한 인물은 송익필과 절친했던 정철이었고, 그 때문에 송익필은 기축옥사를 막후에서 조종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만든 인물로 지목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송익필이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인재였음은 분명하다. 신사무옥 이후 공신에 올라 당상관까지 역임한 아버지의 후광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과 어울렸으며 이산해·최경창·백광홍·최립·이순인·윤탁연·하응림 등과 함께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예학에 밝았으며 당대 사림의 대가로 손꼽혔던 명망으로 인해 김계휘의 아들 김장생을 첫 제자로 받아들였고, 김장생 또한 송익필의 영향으로 예학의 대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일설에 충청도가 양반고장으로 불리게 된 것은 우리나라 예학을 정리한 김장생·김집 부자가 충청도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예학이란 성리학이라는 추상적인 학문을 현실에서 가능한 구체적 규범으로 정리한 학문이고, 쉽게 이야기해서 예의범절에 관한 학문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쉽게 정의되고 규정될 수 없는 복잡한 시대상황과 정치상황이 얽혀 있다.

다만 예의 구체적인 실행 방식에서는 이견이 있었다. 왕은 좀 다르게 다뤄(모셔)야 한다는 왕권신수를 옹호하는(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 남인과, 왕과 신하의 예는 같다는(천하동례·天下同禮) 서인이 대립한다. 이는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참고하는 텍스트의 차이이기도 하다. 남인의 텍스트는 고대로부터 전해진 ‘주례’이고, 서인의 텍스트는 주자가 펴낸 ‘주자가례’이다. 그 사소한 출발에서 비롯되어, 엄청난 피바람이 불어온다. 결국 서인이 평정하게 되는데 그 윗길에 송익필과 김장생이 있고, 실행자는 송시열이다.
김장생은 송익필의 제자이고 송시열은 김장생의 제자이다. 송익필과 김장생이 벼슬과 큰 관계가 없는 자의반타의반 전업 학자였다면, 송시열은 자의반타의반 대단한 정치가이고 예학의 ‘탈레반’이었다.
그는 또한 한 시대의 건축가이다. 그를 건축가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히 중의적이다. 그는 시대를 설계하고 시공했으며, 집 또한 설계하고 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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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이 스승 김장생의 임이정을 그대로 따라 지은 팔괘정. 송시열이 스승 가까이에 있고자 한 마음을 담아 지은 것이라 한다. |
송시열이 지은 집은 대전의 ‘남간정사’(1683)가 대표적이지만, 남간정사의 원류는 강경 높다란 언덕에 지어진 ‘팔괘정’(1633)이다. 그리고 팔괘정의 원류는 다시 김장생이 지은 ‘임이정’(1626)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팔괘정은 임이정과 불과 15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자리 잡고 있는데, 스승 가까이에 있고자 한 마음을 담아 지은 것이라고 하며, 퇴계 이황과 이이를 추모하여 학자 및 제자들에게 강학하던 곳이었다.
옛 집 이름에 붙는 ‘정사’, ‘정’, ‘당’, ‘재’ 등은 어떤 의미이고 무엇이 다른 걸까? 집의 이름을 ‘당호(堂號)’라고 하는데, 보통 집의 용도에 따라 다르게 지어진다. 안계복은 ‘한국건축개념사전’(동녘, 2013)에서 건물 이름 끝에 붙는 용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殿)은 궁궐이나 사찰처럼 위계가 높은 건물에, 당(堂)·헌(軒)·와(窩)는 종택이나 개인이 거처하는 건물에, 누(樓)·정(亭)·정사(精舍)·대(臺)는 유관(遊觀)하는 건물에, 각(閣)은 방이 없는 건물에 주로 붙였다.”

팔괘정이나 임이정의 ‘정’은 ‘설문해자’에서 백성이 안정을 취하는 곳으로 정의된다. 보통 수려한 자연경관을 즐기기 위한 곳이며, 특히 학문을 닦거나 은둔생활을 위해 짓는 경우가 많다. ‘정사’는 학문 연구 기능이 좀 더 강조된 곳이었다. 특히 ‘남간정사’는 송시열이 머물던 시절 전국 사림의 여론을 좌우하고 조정에까지 큰 영향력을 미치던 중심지였다.
임이정(또는 임리정·臨履亭)은 시경에 나오는 ‘如臨深淵’(여림심연), ‘如履薄氷’(여리박빙)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는 뜻이다. 아마도 김장생이 평생 가슴에 품고 행동에 드리어 놓았던 인생의 지침이었던 글자 ‘경’(敬)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살았으므로 김장생이라는 인물은 큰 기복 없이 학문에 열중하고 제자를 길러내며 순탄히 살았을 것이다.
임이정은 그런 집이다. 강경의 언덕에 자리를 하지만 두드러지게 불끈 솟지도 않고 그렇다고 남들이 쉽게 내려다보지도 못하는 위치에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 집은 역시나 세 칸 집, 가장 평범한 그러나 모든 선비가 마지막에 돌아간다는 ‘삼간지제’에 따른 집이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것이 없다. 아주 무난하고 입지에 충실한 집이다.
그런데 그 안에 두 칸 마루와 나머지 한 칸을 반으로 갈라서 뒤에는 잠을 잘 수 있는 방을 두고 앞쪽은 살짝 들어서 누마루를 설치했다. 밖에서는 잘 인지되지 않으나 높지도 않은 그 마루에 앉으면, 아래로 금강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호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밖으로는 온화하지만 안으로는 뜻이 높은, 김장생이 추구하는 삶과도 닮은 집이다. 그리고 주변에는 나무들이 성글지만 느슨하지 않게 펼쳐져 있다. 그런 집의 구성은 송시열이 근처에 지은 팔괘정과 남간정사에 그대로 연결된다.
“팔괘정과 임이정의 지리적 위치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구도와 절묘하게 맞물려 있다. 김장생의 선배 격인 남명 조식, 이황 등 조선 성리학의 완성자들이 은거를 자처해 변두리로 숨어든 것에 비해 김장생을 비롯한 예학의 선봉들이 상업, 교통의 요충지에 그들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조선 중기의 시대적 변천 상황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함성호의 ‘철학으로 읽는 옛집’ 중에서)
송시열에게도 김장생은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었을 것이다. 그는 스승이 지은 임이정을 마주보는 그러나 조금 더 높은 언덕에 그대로 흉내내어 팔괘정을 지었다. 팔괘는 ‘주역’의 기본 괘로서 만물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송시열은 자신의 집을 우주 만물이 함축된 중심으로 보고,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는 조선 예학의 적통으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의지는 말년에 지은 남간정사에서 완성된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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