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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점 찾은 뒤 '대안적 절충안' 제시문 비교 중심에 둬라

입력 : 2015-03-15 19:45:57 수정 : 2015-03-15 19: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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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A to Z] 〈6〉범위(영역)의 차이에 따른 독해
〈제시문〉

[가]전쟁을 피해 고향 집에 돌아온 나는 하루 종일 독서와 사색에 빠져서 가족들을 무심히 대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 가슴에 사무쳤다. 고아는 배고픔에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헐벗은 노파는 이불도 없이 밤새 웅크려 있었으며, 몹쓸 병에 걸린 자들이 허리를 조아려 구걸을 해도 의지할 데가 없었다. 나는 이들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에 하루 하루를 탄식 속에 지냈다.

저들은 저들 자신이 괴로운 것일 뿐 나와는 무관한 일인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까지 동요시키는 것일까? 생각해 보건대 나에게 있는 지각이 천지의 기(氣)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혈맥이 온몸에 통하듯이 모든 사람은 천지의 기와 연결돼 있다.

… 중략 …

남의 불행을 차마 견디지 못하는 인(仁)이야말로 바로 사람을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온 세상 모든 인류는 나의 동포이다. 겉모습은 서로 다르고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책을 통해 저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고 세계 곳곳에서 만든 물건들을 사용하고 여러 나라의 예술을 향유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가 진보하면 우리도 진보하고 퇴보하면 우리도 퇴보하며, 그들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고 그들이 처참해지면 나도 처참한 심정이 된다.

… 중략 …

나는 열강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난세에 태어나 계급과 인종과 남녀 사이의 억압으로 인한 세상의 괴로움을 목격했다. 내 생각으로는 모든 차별을 없애는 대동(大同)의 도(道)야말로 모든 사람을 이러한 괴로움에서 구제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대동의 도를 이루자면 차별을 낳는 가족이나 국가 역시 없애고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가족이 있으면 자기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탐욕을 부리게 되며, 불우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질병과 추위, 굶주림과 무식함을 벗어날 수 없다. 국가가 있으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남의 나라를 착취하며 결국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참혹한 지경에 몰아넣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족과 국가의 구별을 넘어 온 세계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나]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도 오래도록 만나지 않으면 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일본인 1000명의 익사나 러시아인 2000만명의 기아에 관한 기사도 내 아내의 베인 손가락과 위통에 시달리는 어린 아들의 찡그린 표정만큼 나의 동정심을 자극하지는 못한다. 분명 먼 곳의 불행과 가까운 곳의 불행은 우리 마음에 서로 다른 파장을 일으키고, 모든 인간적 사랑과 공감, 그리고 가치 부여는 관심의 원근법의 지배를 받는다.

어떤 이들은 사랑이 좁은 범위에서 넓은 범위로 확산돼 가고, 그와 더불어 사랑의 가치도 증대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자기애보다 동료애가, 동료애보다 조국애가, 조국애보다는 인류애가 더욱 가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사랑도 보편화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 중략 …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사랑의 가치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범위가 커질수록 사랑의 대상에 대한 관심의 거리도 벌어지고, 그에 비례해 집합 안에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가치들도 주변화된다는 사실이다. 가족에 대한 나의 사랑에서는 인격적 가치로 간주되던 것이 더 확장된 공동체에 대한 사랑에서는 그러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만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크기나 그 집합에 속한 사람들의 수와는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라 의미상의 거리이고, 그 거리가 부여하는 가치의 내용이다. 물론 인류 공동체는 어떤 민족이나 국가보다 더 사랑 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지금-여기’에 속박된 인간이 정말 그런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모든 개인은 인류 공동체의 구성원이지만 동시에 더 작고 더 친밀한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며, 공동체 각각의 가치를 구현하며 살고 있다.

그런 개인에게 가까운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강하게 저 먼 인류를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인류애보다 조국애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조국은 인류보다 구체적인 가치의 내용을 개인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민족보다 인류를 사랑하는 일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

[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차이 지점을 찾아내 비교 및 대조해가며 읽어가는 독해의 경우, 범위에 따라 차이가 날 때에는 국지적/전면적, 개인적/집단적, 내면적/외부적, 국내적/세계적, 과학/문화/정치/사회 등의 구도를 그려보면 도움이 된다. 사진은 서울의 한 대학교 논술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답안을 작성하고 있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기출문제에서 자주 등장하는 5대 차이 지점인 ▲주체(대상) ▲범위(영역) ▲수단(방법·과정) ▲효과(결과·영향) ▲목적(원인·동기) 중 이번주에는 범위(영역)상 차이지점이 드러나는 제시문을 쉽게 읽어 내려가는 방법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연습해보자.

제시문 [가], [나], [다]는 인간과 사회의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공감’이라는 수단이 매우 유용하다는 점에서 공통인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제시문들은 공감의 ‘범위’ 면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친다.

[가]는 국가와 계급, 성별 등 차이를 뛰어넘는 대동의 도를 추구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국가와 계급, 성별의 구별짓기는 공감의 폭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이에 따른 갈등과 전쟁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어떠한 구분도 없는 무제한의 공감을 누리는 것은 ‘인(仁)’의 끌어당김으로 인한 당연한 것으로 인식한다.

또 공감은 확장될 수 있고 확장된 공감이 좁은 범위의 공감보다 더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이런 논리에 따라 차별없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는 공감을 이루기 위해 가족 등 특정 집단에서의 공감은 극복돼야 할 대상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확장된 공감이 개인의 실천 윤리를 넘어 사회제도로 구현돼야 한다.

[가]의 관점은 물론 바람직한 이상이지만 [나]의 관점에 의하면 구체성의 빈곤이라는 문제를 불러온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확장될수록 이 공감이 창출하는 가치는 점점 추상화된다는 것이다. [나]는 추상적으로 범위가 확대된 공감보다 좁고 친밀한 범위에서의 구체적 공감에 더 큰 가치를 둔다.

‘민족보다 인류를 사랑하는 일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라는 구절처럼, 민족보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더 넓은 차원의 공감이다.

[나]는 [가]와 같은 무제한적 공감에 대해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를 ‘신’으로 규정해 비현실성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국가라고 하는 제한된 공감의 범위, 더 좁히면 가족이라고 하는 친근감을 공유하는 공감의 범위로 축소되는 것을 더 현실적 입장으로 본다. 현실성 있는 공유의 범위를 설명하며, 그 기준 척도로 친숙도를 들고 있다.

[다]는 [가], [나]의 상충된 두 주장을 연계하는 내용이다. [다]의 화자는 실연의 아픔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개인의 차원에서 보편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 공감의 확장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보여준다. 상반된 [가]와 [나] 사이에서 [다]가 접점을 제시하고 대안적인 절충안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시문 구조에서는 [다]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유용하다. [다]를 과감하게 비교의 중심에 두고 [가]와 [나]의 차이를 부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에서는 화자가 겪는 실연의 아픔이 보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통해 공감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볼 때, 실연의 아픔은 [나]가 추구하고 주장하는 공감의 범위이고, 보편의 영역은 [가]가 추구하는 공감의 범위다.

중요한 것은 공감의 범위는 한정되고 고정 불변인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성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감의 부족 상황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다]는 설명하고 있다.

김윤환 논단기 대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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