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시기 생활상 들여다봐
당시 의복·화장품·결혼 등 조명
![]() |
1934년 유행한 남성복과 여성복 스타일. 남성복은 몸에 붙는 맵시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채륜서 제공 |
![]() |
김태환 등 지음/채륜서/1만4800원 |
1921년 5월28일 경성 조선호텔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다. 결혼식 비용만 지금 돈으로 30억원이었다. 동화의 주인공은 ‘미두왕’으로 불린 반복창과 조선 제일의 미녀 김후동이었다. 반복창은 2, 3년 전만 해도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가 막대한 돈을 모은 비결은 미두시장이었다. 악착같이 400원을 모아 미두시장에 뛰어든 그는 1년 만에 지금 가치로 약 400억원을 벌어들였다.
미두시장은 쌀·콩 선물거래소다. 1896년 일본인이 인천에 첫 미두취인소를 열었다. 미두취인소의 설립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조선의 쌀 가격 안정과 과열 경쟁 방지였다. 그러나 이면에는 조선의 쌀 수탈이라는 일본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애초부터 조선인이 돈을 벌 수 없는 게임이었다. 이를 알 리 없는 민초들은 일확천금의 신기루를 보고 미두시장에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 전 재산을 탕진하고 자살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한탕주의는 시대마다 재생산되는 욕망이다. 근대 조선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유입되고 일본의 수탈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겹치면서 투기 열풍이 휩쓸었다. 미두는 부동산, 금광과 함께 한탕주의가 성행한 대표적 현장이었다. 끝이 좋을 수 없었다. ‘미두왕’ 반복창 역시 결혼 2년 만에 벌어들인 돈을 탕진했다. 그는 30살에 중풍으로 쓰러지고 정신마저 이상해져 끝내 사망한다.
![]() |
기생 장연홍은 근대 조선에서 청순하면서도 매혹적인 눈웃음으로 남성들을 사로잡으며 화장품 모델로 각광받았다. 채륜서 제공 |
현재의 서양식 복식은 근대 조선에 서서히 파고 들었다. 흰 한복은 입고 빨기가 불편했음에도 1920년대까지도 인기였다. 고종 임금이 1894년 신하들의 예복을 검은 명주 두루마기로 하라고 명했지만 흰 한복에 대한 선호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았다. 한복 개량을 놓고 갑론을박도 벌어졌다. 개량복을 적극 받아들인 층은 학생들이었다. 1920년대부터 유행하는 옷차림을 소개하는 기사가 등장한다. 1920년 3월8일자 매일신보에는 남성 옷차림으로 ‘남색이나 자흑색 바탕에 줄 무늬가 들어간 옷감’, ‘재킷 길이가 짧고 바지통이 좁은 옷’이 유행이라는 기사가 실린다. 1920년대 후반에는 나팔바지가 유행하다가 30년대 초가 되면 다시 좁은 소매통이 돌아온다. 이때부터 눈이 나쁘지 않은데도 멋으로 안경을 쓰는 이들이 생겨난다.
신여성들은 흰 피부를 만들어주는 화장품에 열광했다. 두산그룹 창업자 박두병의 어머니 정정숙이 만든 ‘박가분’은 여성들의 필수품이었다. 하루에 약 5만갑이 팔렸다고 한다. 당시 화장품 업체들은 권번의 기생을 모델로 썼다. 가장 잘나갔던 기생은 장연홍이었으며 이 외에도 김영월, 오산월 등이 인기 모델이었다. 과학 상식이 부족했던 당시 화장품은 납, 수은, 붕산 등으로 만들어졌다.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한 부작용이 속출했다.
![]() |
1914년 11월 매일신보에 실린 임질약 광고다. 성병으로 코가 함몰된 여성(왼쪽)과 보통 여성의 사진을 대비해 성병에 대한 공포감을 자극한다. 채륜서 제공 |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