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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최충헌 부자, 文武합작 통치… 민심 얻어"

입력 : 2014-11-20 20:14:14 수정 : 2014-11-20 20: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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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한국학 대표학자 슐츠 하와이대 교수 주장 5·16 쿠데타 이후 노태우정부까지 이어진 군부의 통치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사례다. 무력을 바탕으로 창업을 하고도 대개 글이 칼에 앞서는 ‘문치’(文治)의 전통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대략 1000년 전에도 이런 예외적인 시기가 있었다. 1170년 이후 100년간 지속된 고려의 무신정권 시절이다. 최고 권력은 무인인 정중부, 이의방, 경대승, 이의민으로 혼란스럽게 이어지다 최충헌 이후 최씨 가문이 장악했다. 

최충헌과 최우 부자는 고려의 무신정권을 안정화시킨 권력자들이다. 하와이대 에드워드 슐츠 명예교수는 최씨 정권이 문무 합작을 통해 고려 사회를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무신’의 최충헌(왼쪽)과 최우의 모습.
MBC 제공
힘을 앞세운 무신정권기는 ‘변칙의 역사’로 간주돼 부정적으로 이해됐다. 무신의 권력 독점과 백성의 저항, 이로 인한 사회혼란 등이 무신정권기에 대한 대체적인 이미지이자 평가다. 해외 한국학을 대표하는 학자인 에드워드 슐츠 하와이대 명예교수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그는 최근 발간한 ‘무신과 문신’(글항아리)에서 최충헌 이후 최씨 가문이 문무 공생을 이뤄내고, 백성의 지지를 얻었음을 주장했다.

◆“학문적 관심과 유교 이념으로 고려를 통치했다”

1196년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권력 강화를 위해 새로운 행정조직을 만들기보다는 전통적인 질서에 의존했다. 스스로 그때껏 이어져왔던 문신의 주도권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최충헌 집권 후 문반 관서에 이전보다 많은 무신들이 배치하기는 했지만 문신이 절반 이상이었다는 점이 증명하는 사실이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 집권기에는 문신이 70%가 넘었다.

최씨 가문이 만든 통치기구에는 문무 합작의 기조가 적용됐다. 최우가 만든 ‘서방’은 “문무의 가치를 융합한 최씨 집권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기구다. 서방은 기본적으로 문신으로 구성된 기관이었지만, 국방정책을 수립하는 데도 참여했다. 최우는 서방 소속의 유학자들에게 군사전략을 짜게 했는데, 이들이 공부한 고전들은 야전 전략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슐츠 교수는 “(서방의 활동은) 무신의 권력을 약화시켜 국방 정책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무신과 문신이 연합하는 새로운 시대를 표시하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유학자들 역시 최씨 정권에 협조적이었다. 출사를 거부한 학자들이 없지 않았지만, 최우 집권기에는 권력 구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유학자는 거의 없었다. ‘동국이상국집’의 저자인 이규보는 최우에 의해 발탁돼 고려의 가장 뛰어난 문인으로 성장한 사례다.

슐츠 교수는 “최충헌과 최우는 문신과 그들의 전통을 공개적으로 수용했다”며 “학문적 관심과 유교 이념을 지속시킨 결과 고려를 좀 더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인천에 있는 이규보의 사당 ‘유영각’. 고려의 가장 뛰어난 문인으로 꼽히는 이규보는 최우에 의해 발탁됐다. 이규보 외에도 많은 문신들이 최우 정권을 도왔다.
◆“백성 대부분의 지지를 얻었다”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은 최충헌 집권기 동안 8번 반란을 일으켰다. 잦은 반란은 당대의 혼란상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 슐츠 교수는 이에 대한 최씨 정권의 적극적인 대응과 그 결과에 주목해 최씨 정권이 백성의 지지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최충헌은 집권 직후 왕에 올린 ‘봉사십조’에서 부패한 관원 때문에 농민이 직면한 가혹한 상황을 지적하며 나라의 질서가 잡히려면 농민의 불만이 먼저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천 방안으로는 훌륭한 행정가의 파견과 과시, 사치의 금지를 제시했다. 개혁안을 올린 뒤에는 지방에 중앙관원을 파견해 백성과 대화하고 그들의 분노를 다독이는 데 노력했다. 또 자신의 집권 이전 형해화되었던 지방에 대한 중앙의 장악력을 재확립해 백성들이 지방 관원에게 착취당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최우는 1225년 전국에서 요역을 중지하고, 1246년에는 7년 동안 서해에서 공납을 걷지 않기도 했다. 슐츠 교수는 “이런 조처들은 농민사회를 안정시켰으며 책임과 경제적 부담을 더욱 공정하게 분배하도록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단 반란이 발생하면 강경 대응에 나섰다. 1198년 개성 반란, 1199년 경상도 반란 등은 과감한 공격으로 진압했다. 반란 발생 지역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최충헌의 정책들은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그가 사망한 뒤에 10년 정도 소강 상태가 지속되어 농민 봉기나 그 밖의 국내 소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슐츠 교수의 판단이다. 몽골의 고려 침입 당시 농민들이 유격전을 펼친 것이 “농민의 지원을 확보하려는 최씨 정권의 조세 우대 조처와 면세의 능숙한 사용”에서 비롯되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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