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 향연 ………나도 물들고 싶다
늦가을의 서정을 담을 수 있는 풍경으로는 단풍, 은행나무, 억새, 낙엽을 꼽는다. 단풍과 억새가 가을 내내 사람들 마음을 설레게 했다면, 은행나무와 낙엽은 얼마 남지 않은 가을과의 이별을 짐작케 하는 정물이다.
이즈음 충남 보령 땅에서는 은행나무, 단풍, 억새, 낙엽이 빚어내는 빼어난 풍광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청라면 장현마을은 국내 최대 은행나무 군락지 중 하나다. 마을 곳곳의 은행나무가 3000여 그루에 달하는데, 10월 중순부터 마을 전역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해 11월 초까지 황금색 향연을 펼친다. 옛날부터 은행나무가 많았던 데다 은행 열매로 수익을 얻기 위해 약 50년 전부터 너나 할 것 없이 은행나무를 심으며 은행마을로 불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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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 청라면 장현마을은 국내 최대 은행나무 군락지다. 이 마을에서도 가장 정취가 빼어난 곳은 신경섭 고택으로, 100년 넘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황금빛 터널을 이루고 있다. |
은행마을에서 정취가 가장 빼어난 곳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한 신경섭 가옥이다. 조선 후기 지어진 고택 주변을 100년을 넘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에워싸고 있다. 대문 앞 수나무는 수령이 500년이 넘었다고 한다. 고택 마당에서 뻗어나온 은행나무 가지와 도로 건너편 은행나무가 맞닿아 노란색 터널을 만들고, 담장 주변에는 은행잎이 흩날리고 있다. 고택 안마당에는 이미 은행잎이 수북이 쌓여 있다.
만추에 은행 단풍과 낙엽이 풀어놓는 풍경은 사람 마음을 더없이 화사하고 푸근하게 만들어준다. 평일 낮인데도 이 마을에 추억의 사진을 만드려는 부부, 연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말에 열린 ‘은행마을 단풍축제’에는 수천명이 찾았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100t 가량의 은행도 수확되는데, 이는 토종 은행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양이다.
은행마을에는 은행나무가 번성하게 된 전설도 전해진다. 이 마을 뒷산인 오서산은 까마귀들이 많이 살아 ‘까마귀산’으로 불렸다. 산 아래 연못에 마을을 지키던 구렁이가 천 년 동안 기도를 올린 뒤 황룡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 광경을 지켜 본 까마귀들이 은행을 여의주라고 여기고 산 아래 마을로 물고 와 정성을 다해 키우며 은행나무 군락을 이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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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시 청라면 창천저수지 주변의 은행나무 가로수. |
은행나무의 정취를 즐기고 싶다면 은행마을에서 멀지 않은 창천저수지도 빼놓을 수 없겠다. 창천저수지 남쪽변을 흐르는 36번 국도변에 은행나무가 노란 터널을 이루는 구간이 약 2㎞에 달한다. 가로수 사이로 드라이브를 즐겨도 좋고, 저수지 쪽에서 바라봐도 좋다. 저수지에는 나무데크가 설치돼 은행나무 가로수의 원경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때마침 가을비가 내리며 푸른 호수와 노란 은행나무는 수채화 같은 풍경을 펼쳐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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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와 기암절벽, 바다전망이 어우러지는 오서산 정상. |
은행마을 북쪽에 병풍처럼 솟아 있는 오서산(791m)은 우리 땅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억새 명소다. 올가을에는 지난달 말에 적잖은 비가 내리며 억새꽃이 예년보다 빨리 시들기 시작했지만, 이즈음도 그런대로 억새의 정취는 맛볼 수 있다. 서해안에 바짝 붙은 산으로는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오서산에서는 빼어난 바다 전망도 즐길 수 있다. 정상에 서면 저 멀리 대천해수욕장이 눈에 들어오고 그 앞으로는 원산도·삽시도 등 서해의 섬들이 둥실 떠 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4가지 코스가 있지만,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길은 청라면의 오서산 자연휴양림에서 출발한다. 정상까지는 왕복 4.8㎞로, 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정상 부근이 가팔라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하지만, 억새와 기암괴석, 바다전망이 빚는 풍광은 산행의 수고를 단번에 잊게 해줄 정도로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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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산 휴양림의 단풍과 낙엽. |
은행마을에서 남쪽으로 15㎞쯤 떨어진 성주산 자연휴양림은 충남의 단풍명소다. 예로부터 성인, 선인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성주’(聖住)라는 이름이 붙은 이 산자락에는 여러 계곡이 있지만 휴양림이 조성된 화장골의 단풍을 으뜸으로 친다. 계곡을 따라 놓인 나무데크를 따라 걸으면 형형색색의 단풍터널로 들게 된다. 단풍을 즐기며 짧은 트레킹을 할 생각이면 등산로 초입의 편백나무 숲까지 오가면 된다. 가을비에 젖은 단풍은 더욱 선명한 붉은색을 띠고, 그 아래에는 낙엽이 분분히 날리고 있다. 이 비가 그치면 낙엽의 두께도 두꺼워지고, 가을도 그만큼 깊어질 것이다.
보령=글·사진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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