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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현대화‧세계화 주역 바오로6세 교황 복자된다

입력 : 2014-10-13 15:30:41 수정 : 2014-10-13 15: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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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6세 교황의 모습. 그는 세계성체대회 개최를 위해 인도를 방문하며 아시아 땅을 밟은 최초의 교황이 됐다.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세계화의 주역 바오로 6세 교황(재위 1963-78)이 오는 19일 복자로 선언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는 19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제3차 임시총회 폐막 미사를 주례하며 바오로 6세 교황의 시복 예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이날 시복식을 통해 복자가 되는 바오로 6세 교황은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성 요한 23세 교황과 더불어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이끈 주역이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인 1963년에 교황으로 선출돼 1965년까지 공의회를 이끌었으며, 공의회 문헌을 반포하고 결의사항을 실행해 나갔다. 공의회 이후 가톨릭은 전례 개혁, 미사 중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인 및 무신론자들과의 대화 구현 등 오늘의 현대화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는 또 재임 기간 추기경단을 꾸준히 늘리고 제3세계 출신을 발탁하는 등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을 구현하려 노력했으며, 1969년 한국 최초의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을 임명한 교황이기도 하다.

앞서 교황청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5월 9일, 바오로 6세 교황의 전구(轉求,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간청하고 탄원하는 행위)로 일어난 기적을 승인해 시복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본인과 태아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낙태를 종용받았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임신부가 이탈리아의 한 수녀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수녀가 바오로 6세의 상본(holy card)과 제의 조각을 임신부의 배에 놓고 기도한 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포로 문제, 유대인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으며, 전쟁으로 집을 잃은 무주택자들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미국가톨릭복지협회(NCWC)와 교황청 간 연락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국제 카리타스 설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또 공의회 제3차 회기를 앞둔 1964년에는 여성, 수도자, 평신도의 공의회 입회를 허용했고, 1970년에는 여성 최초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교회 학자로 선포했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될 때 받았던 삼중관(tiara)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신앙의 신비’ ‘민족들의 발전’ ‘인간 생명’ ‘현대의 복음 선교’ 등 다수의 교황 문헌을 통해 교리를 해석하고 세상 속 교회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혔으며, 1978년 8월 6일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교황 별장에서 미사를 드리다 심장마비로 선종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이 시복되면 역대 교황 중 성인은 81명, 복자는 9명이 된다. 20세기 교황들 가운데 성인품에 오른 이는 비오 10세, 요한 23세, 요한 바오로 2세 등 3명이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tols@segye.com

 

<바오로 6세 교황이 걸어온 길>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다.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1920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1921년부터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공부했고 1923년에 교황대사 보좌관으로 6개월간 폴란드에 파견되기도 했다. 1922년부터 교황청 국무원에서 일했고 1924~33년 ‘가톨릭 학생운동’의 지도신부를 맡았다. 1937년 교황청 국무원장이었던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의 비서로 발탁됐고, 그가 비오 12세 교황으로 선출된 뒤에는 신임 국무원장을 보좌했다.

1954년 이탈리아 밀라노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교회를 떠난 노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교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힘썼다. 그는 평신도 사도직과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가톨릭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도록 권했으며, 청소년 문제에도 관심을 쏟았다. 요한 23세 교황은 1958년 그를 추기경에 임명했고,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와 실무조정위원회 임원직을 맡겼다. 몬티니 추기경은 공의회 제1회기(1962년)에 참석했다. 1963년 6월 21일, 요한 23세를 이어 교황에 선출된 그는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를 교황명으로 택하고 공의회를 속개할 뜻을 밝혔다.

공의회는 제4회기까지 열렸고 1965년 12월 8일 폐막됐다. 제4회기(1965년)에는 지역 주교들에게 교황에 대한 자문 권한을 부여하는 영속적 기구로서 주교대의원회의 설립이 착수됐다. 공의회 후속 조치로 전례 개혁, 미사 중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인 및 무신론자들과의 대화 등의 현대화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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