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거창 땅 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다른 풍경과 만나게 된다. 거대한 분지인 거창은 곳곳에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덕유산·가야산 등에서 이어져 나온 산줄기가 도처에 뻗어 있지만, 그 사이로 논농사를 지을 만한 평평한 땅이 제법 있다. 거창이라는 지명도 ‘크고 너른 들판’이라는 뜻이다. 거창은 예전에 한들, 거열(居列), 거타( 居陀), 제창(濟唱) 등으로 불렸는데, 이 역시 거창과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 이중환이 쓴 택리지도 “거창은 땅이 기름지다”고 했을 정도로 제법 큰 규모로 논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수확량도 많았다.
경남 거창은 사방이 높고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 안쪽에는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거창과 합천의 경계인 오도산(1120m)에 오르면 거창 가조면의 황금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
거창의 들로는 거창읍 대평리, 가조면, 위천면 ‘서덕들’을 꼽는다. 대평리(垈平里)는 이름 그대로 넓고 평평한 논이 펼쳐져 있다. 예전에 ‘한들’이라 불린 곳이 바로 대평리 일대다. 이곳에 서면 거창이 산골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거창 서덕들의 너른 들판. 전신주가 하나도 없는 게 인상적이다. |
오도산 정상까지는 포장된 임도가 연결돼 있는데, 합천군 묘산면 쪽에서 오르게 된다. 차를 몰고 임도를 10㎞ 정도 올라 정상에 서면, 가야산 줄기인 의상봉(1032m)과 우두산(1046m) 산줄기가 기세등등하게 내려와 그 아래 평탄한 들녘과 만나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들의 바닷 속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이 물결치는 곳이 바로 가조면이다.
거창 서쪽의 위천면도 너른 들이 펼쳐지는데, 그중 단번에 눈길을 끄는 곳은 서덕들이다. ‘서쪽의 너른 들녘’이라는 뜻의 서덕들에는 특이하게 전신주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변이 모두 산악지대이다 보니 민가가 들어서지 않았고, 그래서 전깃줄을 연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전신주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서덕들은 산과 산 사이 완만한 비탈에 조성된 논이어서 얕은 계단식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바둑판 형상이다. 서덕들의 논두렁 곳곳에는 코스모스와 억새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인근 과수원에는 거창의 명물인 사과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가을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정물을 두루 갖추고 있는 곳이 바로 서덕들이다.
거창에서 천천히 걸으며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인근 황산고가마을도 빼놓을 수 없겠다. 황산고가마을은 500년 역사를 지닌 거창신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고택이 20여 가구 남아 있다. 600년 묵은 고목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문화재로 지정된 길이 1.2㎞의 옛 담장이 이어지는데, 고즈넉하고 아늑한 정취가 그만이다. 이 담장 위 감나무에는 주홍색 감이 영글어가고, 그 옆으로는 역시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이 가을 바람에 출렁이고 있다.
거창은 가을 여행명소로 이름난 산과 계곡이 즐비하지만, 황금 들녘을 목적지로 삼아도 좋을 듯싶다.
거창=글·사진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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