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김백철 책임연구원이 지은 ‘두 얼굴의 영조’(태학사·사진)는 영조와 그의 시대가 보여준 다양한 면모를 학술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영조의 정치를 대표하는 ‘탕평’이 키워드다. 붕당 정치를 극복한 탕평이 시대적 과제였고, 영조의 업적은 탕평을 통해 가능했다고 본다. 하지만 탕평을 통해 만들어진 절대적인 권위는 임오화변과 같은 극단적 사태를 불러왔다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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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1대 임금인 영조의 어진(보물 932호). 영조는 조선의 중흥을 이끌고, 애민을 실천한 임금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과격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
영조가 등극하기 전의 조선은 극심한 혼란에 직면했다. 대기근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 감소, 조세 체계 개편에 따른 경제 변동, 유민 발생에 따른 사회적 이완 현상 등이 사회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 체제는 이런 문제에 대한 대응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집권세력이 짧은 시간에 바뀌는 ‘환국’(換局)이 이어지면서 어떤 붕당(정파)도 개혁을 완수할 만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또 각 붕당은 정책 대결을 넘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영조가 즉위할 무렵 변화의 요구는 정점에 달했다. 탕평정치, 곧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 체제를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된 것이다. 영조는 즉위 후 각 붕당의 인물 등용을 기계적으로 맞추는 인사정책인 ‘쌍거호대’, 붕당의 기반이 된 서원 철폐 등의 정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각 붕당의 인사가 고루 포함된 관료군이 형성됐고, 강력한 왕권의 배경이 됐다.
힘을 갖게 된 영조는 개혁을 추진했다. 일반 백성들의 세금을 절반으로 줄이고 왕실, 사족, 부유한 양민, 지방 관아 등에서 부족한 세수를 채우는 ‘균역법’이 대표적인 사례다. 관련 논의는 100년 이상 지속됐으나 집권세력에 따라 정책은 번복되기 일쑤였다. 영조의 리더십이 확립되고서야 중앙정부 차원의 통일적인 정책이 마련됐다. 김 연구원은 “강력한 탕평군주의 등장으로 각 사회의 이해관계를 억누르고 (백성의) 생활 안정을 보장하는 정책이 시행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속대전’, ‘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을 통한 제도 정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 연구원에 따르면 영조는 재위 20년대 후반까지 개혁 작업을 얼추 마무리했다. 이때까지 영조는 인내하고 타협하면서 서로 다른 정치 세력을 모두 자신의 신하로 만드는 데 성공한 군주였다. 하지만 재위 31년(1755년)의 ‘을해옥사’를 전후로 통치 스타일은 바뀐다.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나주 괘서사건을 처리하면서 벌어진 을해옥사에서 영조는 전에 없이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주요 범죄자 136명을 처형했고, 700여건에 대한 처벌이 내려졌다. 즉위 초 일어난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인 ‘무신란’에서조차 이 정도의 처벌은 없었다. 을해옥사 이후 영조의 타협적인 면모는 상당 부분 사라지고, 각 붕당에 대한 강경한 어조와 행동이 나타났다. 김 연구원은 “을해옥사를 기점으로 당론은 표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고 밝혔다. 강력한 권위로 붕당을 억압해 ‘무당’(無黨)의 상태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힘의 정치는 부작용을 동반했다. 당론의 금지는 여론의 형성까지 어렵게 만들었다. “치국(治國)의 도리와 언로(言路)를 열어달라”고 주문한 신하를 서인으로 만드는 등의 조치가 이어지면서 통상적인 언론 기능이 마비된 것. 상황이 악화되자 신하들은 사도세자에게 희망을 보고 결집하기 시작했다. 영조는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세자 보호에 나서는 상황을 “부당(父黨)과 자당(子黨)의 출현”이라며 죄악시했다. 김 연구원은 “세자를 중심으로 새롭게 정파가 결집되는 것을 영조가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가 1762년의 임오화변이었다.
을해옥사를 기점으로 한 통치 스타일의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영조의 장수를 원인으로 꼽은 것이 흥미롭다. 영조는 82세(1694∼1776)까지 살며 조선의 임금들 중 가장 장수했고, 재위 기간만 52년이었다. 을해옥사가 있던 재위 31년, 영조는 60세를 넘겼다. 이때쯤이면 개혁을 함께 이끌었던 동료이자, 비판세력인 동년배 신하들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미스터 쓴소리’가 되어 줄 신하들이 사라진 것이다. 김 연구원은 “을해옥사 이후의 신하들은 아들, 손자뻘이었고, 영조가 그들과 터놓고 지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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