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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권내현 지음/역사비평사/1만2800원 |
“신분의 장벽은 그들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운명은 태어날 때 이미 상당 부분 결정되어 있었다. 눈을 뜬 순간 한 사람 곁에는 대대로 양반의 핏줄을 이어받은 부모가, 또 다른 사람 곁에는 노비인 부모가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그랬다. 부모의 신분은 곧 자신의 신분이었고, 피하기 힘든 운명이었다. 신분제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노비들에게 엄청난 족쇄였음은 물론이다. 책은 신분제의 디테일을 파헤친다. 초점을 둔 것은 노비. 호적대장을 통해 노비들의 삶을 추적하고 복원한다. “조선시대의 평범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이만큼 방대하게 기록된 자료가 없기 때문에” 호적에 주목한다.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컸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희망을 담아야 할 이름부터가 천했다. 江牙之(강아지), 斗去非(두꺼비) 등은 동물에 빗댄 것이고, 돌쇠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淡沙里(담사리)는 “남의 집 담에 붙어 산다”는 의미였다. 自斤連(작은년), 於仁連(어린년)과 같이 ‘년’으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여자 종이 많았다. 노비에게 붙여진 천한 이름은 “작명을 통해 발현되는 욕망의 거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가족의 해체는 노비에게는 상존하는 위협이었다. 양반의 재산이었던 노비는 상속 대상이었다. 1480년 김광려 남매의 상속 내용을 보면 노비인 막동의 아내가 임신 중인 아이까지 상속하고 있다. 이렇게 ‘분배된’ 노비는 주인의 거주지에 따라 움직여야 했고, 따라서 노비는 언제라도 흩어질 수 있었다. 100세가 넘는 것으로 호적에 기재된 노비의 나이는 ‘노비 소유권’에 대한 양반들의 무서운 집착을 보여준다. ‘순금 219세’, ‘돌화 196세’, ‘용진 189세’ 등으로 적어놓았다. 실제 이만큼 살았을 리 만무한 이들은 도망 노비였다. 도망 노비의 후손을 찾아내면 주인이었던 양반의 후손이 소유권을 가지기 때문에 근거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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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 작성된 김수봉이라는 인물의 호적대장. 네모 안에 나이, 거주지, 신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비평사 제공 |
책은 노비의 생활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인이었던 양반의 호적까지 분석하며 조선의 다양한 생활사를 소개한다. 재산 상속 방식과 입양제도의 변화, 시집살이의 정착 과정, 재혼을 포함한 풍습 등이 서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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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양반을 정점으로 중인, 평민, 천민으로 이어지는 엄격한 신분제 질서를 유지했다. 신분제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노비는 비참한 운명처럼 지워진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조선시대 말 노비 관련 소송의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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