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궁궐에서 평생을 보내다, 죽으면 능에 묻혔다. 왕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아 있는 곳이 궁궐, 능이다. 국가의 상징이자, 정점이었던 왕의 생전과 사후 거처였던 이곳의 조성과 운영에 왕조의 이념, 사회구성 원리, 정치 체제 등의 핵심 원리가 투영되는 건 당연지사. 이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 최근 출간됐다. 문화재청 장영기 민관협력전문위원이 쓴 ‘조선시대 궁궐 운영 연구’(역사문화)는 궁궐 운영에서 명나라,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차별적 인식이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분석한 것이 흥미롭다. 상지영서대 이창환 교수의 ‘신의정원 조선왕릉’(한숲)에는 신분제의 원리가 왕릉 조성에 표현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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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거처인 궁궐의 조성과 운영에는 조선의 이념, 사회구성 원리, 정치 체제 등의 핵심이 반영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여러 궁궐 중에서 경복궁이 ‘법궁’으로서 가장 중시되었고, 정전인 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서 즉위식, 과거 등 중요한 의식이 치러지던 곳이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당대의 최고의 장인과 재료를 동원하고, 활용한 각 궁궐은 조선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지만 같은 궁궐이라 해도 위계가 있었다. 조선초의 경복궁,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된 이후의 창덕궁은 ‘법궁’(法宮)으로 궁궐의 기준이었다. 나머지는 ‘이궁’(離宮)으로 보조적인 성격을 가졌다. 궁궐을 구성하는 정전과 편전, 침전 등도 마찬가지여서 즉위식, 과거 등의 장소로 활용된 정전이 궁궐의 수많은 전각 중에서 으뜸이었다.
장 위원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은 17세기 중국 왕조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자 궁궐 운영을 통해 두 나라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당대 국제질서를 규정하던 중국 왕조의 교체에 따라 조선의 세계관에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차별적 인식은 사신 접견 장소가 달라진 데서 확인된다.
조선의 명 사신 접견은 법궁의 정전, 즉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이뤄졌다. 이곳에서 외교문서를 받아 열람하고, 다례 등 일체의 의식을 치렀다. 왕은 창덕궁 등의 이궁에 있다가도 사신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경복궁으로 이동했다. 장 위원은 이를 “예전(禮典)의 규정과 실제적 운영의 일치”, “법궁-이궁 체제의 운영방식에도 부합하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청 사신의 접견은 달랐다. 접견의 장소로 법궁을 굳이 고집하지 않았다. 사신이 왔을 때 왕이 거처하던 곳에서 만났다. 전각 역시 정전만이 아니라 편전, 침전 등을 활용했다.‘왕의 병환’이 이유였다. 왕이 아프니 융통성 있게 하자는 의미다. 명 사신을 만날 때는 아파도 정전을 활용했던 전례와 비교하면 핑계일 뿐이었다.
장 위원은 예우가 낮아진 원인으로 “청나라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거부감”을 꼽았다.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로 인식했던 청에 대한 항복과 군신관계의 설정은 조선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것이 실제 이유였다.
조선의 차별 대우는 18세기 초 양국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경종은 병에 걸려서도 정전에서 사신을 만났고, 영조는 왕세자나 신하가 하던 모화관에서의 사신 영접, 전송을 자신이 직접 했다. 장 위원은 변화의 원인을 “명을 멸망시킨 후 조선에 대한 청의 강압적 외교정책이 점차 완화됐다. 문물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적대시하던 청에 대한 인식도 변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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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인·무석인 왕릉의 석조물은 당대의 정치, 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다른 왕릉의 석조물에 비해 덩치가 큰 선릉의 문석인(사진 왼쪽)과 무석인은 강화된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서울 강남의 한복판, 개발의 압력을 버티고 녹음을 뽐내는 곳에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선릉이 있다. 생전에 그랬듯 왕은 신하들의 호위를 받고 있다. 죽은 왕의 침전인 능이 있는 곳이 ‘상계’(上階), 그 아래에 ‘문석인’(文石人)이 선 곳은 ‘중계’(中階), ‘무석인’(武石人)은 마지막 ‘하계’(下階)에 자리잡았다. 문·무석인 모두 몸집이 크고, 얼굴이 사실적이며 윤곽이 굵어 왕의 권위를 석상의 모습에 반영한 듯하다. 왕과 왕비, 추존왕의 무덤인 44기 왕릉의 성역 ‘능침공간’은 이 같은 형태를 기준으로 조성됐다.
이 교수는 “능침공간의 삼계는 조선시대의 통치철학인 유교에서 지향하는 성리학과 봉건계급사회의 영향으로 사료된다”고 분석했다. 문석인을 능침 가까이에 배치한 것은 문인을 무인보다 중시했던 봉건적 인식의 영향으로 본 것이다. 중계, 하계의 규모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조선 개국을 이끈 무인들의 영향이 컸던 초기에는 문신의 공간보다 무신의 공간이 넓었다. 하지만 유교적 신분제도가 확립되는 중기에 이르면 넓이가 같아졌다. 사회 혼란으로 신분제가 붕괴되는 후기에는 문무의 공간 구분이 사라졌다.
석상의 크기는 성종 이후 왕권 강화를 모색하면서 커졌다가, 실학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실제 크기에 맞춰 줄어들었다. 이 교수는 “석조물 배치 및 규모는 정치적, 사상적 영향에 따라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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