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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일제시대 걸쳐 독립운동가·민족지사 대거 배출

관련이슈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입력 : 2014-07-29 21:16:32 수정 : 2014-07-29 21: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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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6>홍(洪)씨, 남양홍씨(南陽洪氏) 2편 ◆남양홍씨 당홍계 근·현대인물

홍순목(洪淳穆)은 대원군의 심복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하지만 그의 아들 홍영식(洪英植)은 병조참판으로 김옥균과 더불어 개화당을 이끌었으며 갑신정변을 주도하다 실패하고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다. 또 의정부 찬정(贊政)이었던 홍만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못 이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반면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건의하여 개화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자 관동유림을 대표하던 홍재학(洪在鶴)은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다 참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 홍종우(洪鐘宇)는 수구파로 프랑스에 유학한 뒤,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김옥균에게 접근한 뒤 암살하였다. 이후 황국협회를 만들어 독립협회 활동을 방해하기도 했다.

또한 구한말 국난시대 남양홍씨 당홍계에서 많은 의병을 배출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洪範圖)이다. 홍범도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1907년에 차도선, 태양욱 등과 평안북도에서 포수들로 구성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부대는 압록강을 넘나들며 삼수, 혜산, 풍산, 만포진, 봉오동 등지에서 승리를 이끌며 일제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 후 김좌진 등과 합세하여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서일을 총재로 추대하고, 김좌진 등과 함께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고려혁명군사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과 대립을 꺼린 소련군에 의해 강제로 무장 해제되었다. 이를 ‘흑하사변’이라고 한다. 그는 이후에도 연해주에 농장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옮겨간 뒤 1943년에 병사했다. 지금도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는 그의 흉상이 있으며, 건국공로훈장 복장(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홍병기(洪秉箕)와 홍기조(洪基兆)는 천도교 대표로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였으며, 3·1운동 후 홍병기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홍기조는 국내에서 민족정신 고취활동을 전개하였다.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익성(洪益成)은 기독교 장로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안동과 만주 일원에서 임정 연락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신의주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서울 경교장(강북삼성병원) 뒷편에 홍난파가 살던 홍난파 가옥이 있다. 홍난파는 ‘봉선화’ 등을 작곡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운 근대 음악의 선구자였지만, 말년엔 친일논란이 있다.
그 외 홍식(洪植)은 독립군사령부 제3영장으로 국내에 들어와 일경과 교전 중 전사하였으며, 홍학순(洪學淳)은 식산은행 의주지점을 습격하고, 만주와 평안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홍원식(洪元植)은 3·1운동 때 고향인 화성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는데, 제암리 학살사건 때 현장에서 살해당하였다. 홍승노(洪承魯)는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으며, 광복 후에는 반민특위 감찰위원과 김구의 한독당 감찰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렇듯, 남양홍씨 당홍계에서는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 걸쳐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족지사를 배출하였다.

광복 후에는 중앙일보 회장과 법무, 내무장관을 역임한 홍진기와 주미대사와 중앙일보 회장을 지내는 홍석현 부자가 있다. 홍진기 일가는 삼성 이병철,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노신영, 동아일보 김병관 일가 등과 사돈관계를 맺는 등 현대사를 주름잡고 있다. 그럼에도 홍진기는 일제하에서 판사를 지내고,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내무장관을 역임하며 조봉암사건, 4·19시위대 발포사건 등과 연루되어 있어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그 외에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홍성철, 문공부장관을 지낸 홍종철, 지식경제부장관을 역임한 홍석우,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지낸 홍경모, 홍두표, 국회의원으로는 한나라당 대표를 지내고, 경남지사에 재직하고 있는 홍준표를 비롯하여 홍창섭, 홍종욱, 홍재형, 홍정욱, 홍문종, 홍영표, 홍일표, 홍문표, 홍희덕 등이 있으며,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을 역임한 홍진표가 있다. 그 외 학계에서는 홍기창(고려대교수), 홍순옥(동국대교수), 홍문화(서울대 약대교수), 홍윤숙(시인)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이건희 삼성회장의 부인이자 라움미술관장인 홍라희, 남양유업 창업자인 홍두영 회장과 그의 아들 홍원식(남양유업 회장), 홍철호(굽네치킨 사장) 등이 있다. 

 
홍영식의 모습을 담은 우표.
◆남양홍씨 토홍계는

남양홍씨 토홍계는 남양홍씨 전체 인구 40여만 중 3만여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선시대와 현대에 걸쳐 배출한 인물은 결코 적지 않다. 따라서 남양홍씨가 조선의 4대 명문가문이 된 것은 당홍계뿐 아니라 토홍계의 역할도 결코 적지 않다.

남양홍씨 당홍계에서는 토홍계가 당홍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토홍 측에서는 중국에서 건너온 당홍과 달리 토착성씨임을 내세우고 있다. 토홍의 시조는 홍선행(洪先幸)으로 어려서부터 당성(남양의 옛 지명)에 세거했던 사족의 후손인데,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냈다고 알려진다. 시조 홍선행의 9대부터 12대 사이에 문희공파(文僖公派), 정효공파(貞孝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등 5개 파가 갈라졌다.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123명을 배출하고, 상신 2명, 대제학 1명, 청백리 3명, 부마 1명, 공신 3명을 배출하였다. 이는 현재 토홍의 인구 3만여 명을 가정할 때 어떤 가문보다 많은 숫자이다. 

홍영식은 근대 우편제도의 효시인 우정총국을 설립하고 초대 총관이 되었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한 갑신정변은 우정총국 낙성식을 계기로 봉기한 정변이었다.
◆남양홍씨 토홍계의 연혁과 인물

남양홍씨 토홍계는 조선시대 중기에 들어와 시조 홍선행의 9대조 후손인 문희공 홍언필(洪彦弼) 이후로 가문이 크게 번창했다. 홍언필은 승지였던 홍형의 아들로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지도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어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지평을 역임하였다. 사가독서한 후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다시 기묘사화로 투옥되었다. 하지만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광필의 변호로 풀려났으며, 형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여섯 번에 걸쳐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형조, 이조, 호조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좌찬성에 올랐다. 김안로의 모함으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김안로가 실각되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의 부인은 영의정을 지낸 여산송씨 송질의 딸이다.

또 그의 아들 홍섬(洪暹)은 선조 때 영의정을 3번이나 역임하였다. 중종 때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김안로를 탄핵하다가 홍양에 유배되었으며, 석방된 후 경기도 관찰사와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선조 즉위 후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고 3번에 걸쳐 영의정에 올랐다. 

홍대용이 청나라를 다녀와 3년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혼천의. 홍대용은 그의 저서 의산문답을 통해 지동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하여 동양의 정신세계인 화이사상을 무너뜨린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로 여겨지고 있다.
또 정효공파의 파조인 홍담(洪曇)은 홍언필의 조카인데, 선조 때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올랐고, 효성이 극진해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그의 손자인 홍희(洪憙)는 왕자사부와 동지돈녕을 지냈으며,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의 이모부가 된다. 그의 아들 홍진도(洪振道)는 판중추부사를, 홍진문(洪振文)은 한성좌윤을 역임하였다. 또 6대손인 홍억(洪檍)은 정조 때 6조 판서를 모두 역임하였다.

참의공파의 파조는 이조참의였던 홍한(洪瀚)이다. 그는 무오사화 때 화를 입었다. 그의 증손으로 홍가신(洪可臣)이 있는데, 그는 수원부사, 개성류수,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특히 홍주목사시절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여 정난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는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시문과 필법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손자 홍우정(洪宇定)은 이이첨의 모함으로 8년간 천안에 부처되었다가, 병자호란으로 국치를 겪은 후 문수산에 은둔하여 영남절사로 불리우고,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홍우정의 아우 홍우원(洪宇遠)은 숙종 때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홍우량(洪宇亮)은 청백리에 뽑혔다. 

홍대용이 태어난 곳인 천안에 홍대용과학관이 설립되어 있다.
대호군공파에서는 장희공 홍숙(洪淑)이 대사헌과 형조, 예조,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형조판서로 재직할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등 사림파를 숙청하는데 관여하였다. 그의 손자 홍려(洪?)는 중종의 사위가 되었다. 홍숙의 현손인 홍익한(洪翼漢)은 김상헌 등과 함께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삼학사의 1인이었으며, 병자호란이 끝난 후 오달제, 윤집 등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살해되었다. 그의 부인인 허씨와 아들 홍수원, 며느리 이씨도 피난길에 함께 죽었다. 그가 순절한 후 도승지와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려가 명해졌으며, 광주의 헌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장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또 남양홍씨 토홍계에서 유명한 인물은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이다. 그는 남양홍씨 토홍계 정효공파이며, 목사였던 홍력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류득공 등과 함께 북학파의 일원으로 천문학과 경제에 일가를 이루었다. 영조 때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는 삼촌 홍억을 따라 북경에 가서 서양문물을 배워왔다. 그는 음양오행설 대신 기화설(氣火說)을 주장했으며, 지구자전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지역주민 천거에 의한 공거제(貢擧制)를 주장했으며, 천문학 연구를 위해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기도 했다. 

남양홍씨 토홍계의 시조단비에는 시조인 홍선행과 이후 6세조까지 모셔져 있다.
◆남양홍씨 토홍계 근·현대인물

근·현대에 들어와서도 남양홍씨 토홍계에서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중 독립협회 간부였던 홍정후(洪正厚)가 있으며, 봉선화의 작곡가이면서 근대 음악계의 거장인 홍난파(洪蘭坡, 본명은 영후·英厚)가 있다.

홍난파는 경기 수원 출신으로 동경 우에노음악학교에서 수업한 뒤 ‘봉선화’를 작곡하였으며, 1925년엔 우리나라 최초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음악잡지인 ‘음악계’를 발간하였으며,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를 지냈다. 또 이화여전과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서양음악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며, ‘봉선화’ 외에도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의 가곡과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를 작곡했다. 또 문학에도 재능을 보여 소설로 ‘향일초’, ‘처녀혼’, ‘폭풍우 지난 뒤’ 등을 저술하였다.

또 같은 수원 출신으로 시인이었던 홍로작(洪露雀, 본명은 사용·思容)은 ‘나는 왕이로소이다’, ‘백조는 흐르는데, 별하나 나하나’ 등을 지었고, 토월회 동인으로 연극활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 외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고 계급인 일본군 중장까지 올라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된 홍사익도 남양홍씨 토홍계이다.

현대에 들어와 남양홍씨 토홍계 인물로는 전경련 회장을 역임한 홍재선, 대한변협회장을 역임한 홍승만, 한국일보 부회장을 역임한 홍유선,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인 홍사중이 있으며, 정·관계에서는 홍사덕(전 국회의원, 민화협 상임의장), 홍승직(고려대 교수), 홍사석(연세대 의대 교수), 홍사풍(고려인삼 회장) 등이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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