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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권력의 이름 '섭정', 지구촌패션 간판 되다

관련이슈 강상헌의 만史설문

입력 : 2014-07-13 20:46:33 수정 : 2014-07-14 0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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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24〉 ‘리젠시’라는 브랜드의 사연 외래어에 홀딱 빠진 상술(商術)은 명품 같은 물 건너 배 타고 온 물건, 즉 박래품(舶來品·수입품) 좋아하는 후진적 소비 성향 등의 영향이리라. 언제부턴가 ‘리젠시’라는 이름이 주위에 흔해졌다. 가방 같은 패션 소품을 비롯해 연립주택, 모텔, 리조트(휴양시설), 가구, 여행상품 등에 ‘리젠시’들이 많다. 성형외과나 인테리어 업소, ‘헤어 디자이너’의 간판들도 그렇다.

‘호화롭다’, ‘세련되다’, ‘서구적이다’와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한 작명(作名)이겠다. 흔하다 보니, 또 그런 이름을 단 상품이나 시설이 실제로는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한 까닭이어서인지 이젠 그 말이 후줄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행의 정점을 지나 하강 국면에 접어든 것인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인 부르봉 왕조의 루이 14세(재위 1643∼1715). 절대왕정의 대표적 전제군주로 ‘태양왕’이란 별칭이 있다.
리젠시 유행의 직접적 계기는 외국에서 들어온 한 호텔 체인의 이름이겠다. 아무래도 좀 있어 보이는 이름 아닌가. 한 성형외과에 전화해봤다. “호텔에도 붙은 이름인데 좀 근사하잖아요?” 의사 선생님의 대답, 뜻이 뭔지는 모른다고 했다.

‘빌라’가 대중적인 공동주거의 대명사로 굳어진 것과 비슷한가? 빌라(villa)는 휴가용 별장이나 교외의 저택(邸宅)을 뜻하는 단어다. 부자들이 집에서 누리는 행복을 이름에서나마 느껴 보라는 배려였으리라. 주택가에는 요즘도 이 이름 든 주소가 많다.

리젠시(regency)는, 뜻밖에도, 섭정(攝政)이란 뜻이다. 왕(임금)이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 그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 또는 그 사람을 가리킨다.

임금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섭정인 경우, 동양에서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고 했다. 발[簾]을 늘어뜨리고[垂] 정치[政]를 듣는다[聽]는 뜻, 여성이 앞에 나서지 않는 동양의 전통이 빚은 특별한 정치 형태다.

뜬금없는 이름 아닌가. ‘섭정’이 패션이나 호텔의 이름이 되다니. ‘리젠시’의 어떤 이미지가 그런 이름을 짓는 꼬투리가 됐을까. 그런 식이면, 화장품 이름을 ‘수렴청정’으로 붙이면 어떤가. 있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다판다’ 이름도 사용료를 받았다면, ‘막가파’ 이름도 천금(千金)의 가치 주장할 수 있지 않나. 세월호 참사로 한심해서 해보는 얘기다.

루이 14세가 거의 다 지은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5세 때의 섭정 오를레앙 공의 취향에 따라 마무리나 실내장식에 상당한 변화가 주어졌다. 이런 변화를 서양 예술에서는 레장스(섭정) 스타일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파악한다.
프랑스어 레장스(regence)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불어사전에는 ‘섭정’ 뜻 말고 ‘오를레앙 공 섭정시대풍의 (우아하고 유연함)’, ‘(풍속 따위가) 퇴폐한’ 등의 풀이가 이어진다. 오를레앙 공은 루이 14세 다음 왕인 루이 15세 때의 섭정(1715∼1723)이었다.

그는 전쟁도 꽤 잘했고 소르본대학 학비를 무료로 하고 금서(禁書)를 풀어주는 등 정책으로 제법 인기를 얻었으나, 방탕한 행실과 돈에 얽힌 스캔들로 결국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후세에 오래 남게 된 것은 건축과 장식 등의 예술양식 때문이었다.

그의 취향은 ‘태양왕’ 루이 14세 때까지의 바로크 양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르네상스 이후의 장중(莊重)함이 특징이던 장식예술에 우아한 곡선이나 아시아(중국)풍을 도입하고, 건물 내부 기둥이나 벽면 모서리에 세세한 장식을 넣는 등 변화를 준 것이다. 루이 14세가 거의 지어놓은 베르사유궁전의 마무리나 인테리어가 새로운 양식으로 완성됐다.

이런 변화의 결과를 레장스 스타일, 즉 섭정양식(攝政樣式)이라고 한다. 신기원(新紀元)을 개척한 것이다. 권력의 형태를 부르는 이름이 예술 시대 구분의 한 표지가 됐다. 루이 14세부터 레장스 스타일을 거치는 이 시기가 프랑스를 ‘예술의 나라’이게 한 씨앗이 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레장스 스타일은 다음 시대 로코코 양식으로 이어진다.

이런 역사와 이미지를 영어권이 빌려 레장스의 영어 리젠시를 상업적인 이름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또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따위의 서양(사) 개념들이, 좀 뜬금없기는 하지만, 이렇게 우리와도 인연을 맺었다.

흥선대원군(이하응)은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섭정 중 한 명이다.
한말, 왜국(倭國) 등 외세의 침탈에 나라가 휘청거릴 때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삼각구도 정치 드라마 또한 섭정의 역사다. 1863년 철종 사망으로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에 나서고 섭정 왕후는 고종을 왕위에 올린다. 곧 대원군이 섭정이 된다.

중국 청나라 서태후(西太后)는 아들과 조카를 차례로 왕위에 올려 섭정했다. 민중의 개혁운동을 진압하고, 의화단(義和團)의 난(亂)을 선동하는 등으로 나라를 망쳤다. 황제를 칭(稱)했던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또한 수렴청정 이야기의 주역 중 하나다.

서양의 섭정은 저렇게 ‘예술의 이름’을 인류에 끼쳤다. 우리 동양의 섭정이 역사에 남긴 흔적들을 보니 좀 끔찍한 생각이 든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장 ceo@citinature.com

■사족(蛇足)

리젠시, 리젠트, 리젠트십(regentship) 등 ‘섭정’과 관련된 단어의 어원(語源·etymology[에티몰로지])은 라틴어 regere[레게레]다. ‘다스리다(to rule)’ 또는 ‘반듯하게 하다(to keep straight)’라는 의미다.

지배, 통치 등의 뜻 reign[레인], (다스리는) 지역이나 영역(領域) region[리전], 다스리는 방식 즉 정치제도 regime[레짐] 등의 단어가 regere로부터 번져 나왔다.

이 regere 앞에 ‘함께(together)’의 뜻 ‘com-’을 연결해 ‘정확하게 하다’라는 뜻의 correct, ‘∼으로부터’의 뜻 ‘dis-’를 붙여 ‘똑바른’이란 뜻 direct 등의 합성어가 만들어진 것으로 영어학은 파악한다. 영어의 어원학이다. 어떤 언어든 그 원류가 있기 마련이다.

라틴어(Latin)는 이탈리아 중부 라티움 지방에서 생겨난 언어로 로마와 그 주변에서 썼다. 로마가 커지면서 지중해 전역과 유럽의 상당한 범위까지 퍼졌다. 이탈리아어·프랑스어·에스파냐어·포르투갈어·루마니아어 등이 라틴어의 후손이다. 영어의 많은 어휘도 라틴어에서 왔다. 지금 모(국)어로 쓰는 나라는 없으나, 바티칸과 전 세계의 천주교회에서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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