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중 ‘방황하는 칼날’(감독 이정호)에서의 그의 연기는 오래도록 회자될 만하다. 정재영은 이 영화에서 또래의 청소년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하다 목숨을 잃은 딸의 아버지 상현 역을 맡아 절절한 부성애 연기를 펼쳤다. 이 영화는 피해자의 아버지가 가해자들을 찾아나서 처절한 복수에 나서는 내용으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정재영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꼽은 영화는 스웨덴 출신 다르덴 형제(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의 ‘아들’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역시 자식을 잃은 슬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상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식을 잃은 슬픔에 대처해 나간다.
주인공 올리비에 역을 맡아 복잡하면서도 절제된 감정을 표현해낸 배우 올리비에 구르메는 이 작품으로 2002년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제목: 아들(2002, 벨기에)
감독: 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국내개봉: 2004년 2월20일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02분
등급: 전체관람가
# 정재영 Says..
‘방황하는 칼날’ 이정호 감독의 추천작이었어요. 그러니까 재작년에 본 영화인데, 그때 본 감동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네요.
‘아들’은 한 마디로 ‘용서’에 관한 영화예요. 어찌 보면 ‘방황하는 칼날’의 대척점에 있는 영화인 셈이죠. ‘방황하는 칼날’은 주인공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죽인 소년들을 찾아 응징하지만, ‘아들’은 그 반대예요. 주인공(올리비에 구르메)은 아들을 죽인 소년을 받아들이게 되죠.
엔딩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두 인물이 다시 원래의 상황으로 돌아가며 밑도 끝도 없이 끝나요. 그때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큰 울림이 느껴졌어요.
감독님이 촬영 들어가기 전, 왜 이 영화를 추천했는지 알 수 있었죠. 자식 잃은 아버지의 마음,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뜨겁게 올라왔다고 해야 할까요.

목수인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는 가구제작훈련센터에서 출소한 아이들에게 목공 기술을 가르친다. 그러던 어느 날 16세 소년 프란시스(모건 마린느)가 제자로 들어온다.
올리비에는 이때부터 프란시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기 시작한다. 다른 학생들을 대할 때와는 다른 눈빛이다. 올리비에의 시선은 언제나 프란시스를 향해 있다.
카메라는 올리비에의 등 바로 뒤에서 올리비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꽉 찬 화면, 거친 숨소리, 그리고 핸드헬드 기법의 카메라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민하는 주인공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한다.
올리비에는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진 전처 마갈리(이사벨라 소파트)를 찾아가 프란시스를 만났다고 고백한다. 프란시스는 11세의 나이에 두 사람의 아들을 죽게 한 장본인이었던 것. 마갈리는 두 사람이 만나는 걸 격하게 반대한다.

‘아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빼앗아버린 범죄자에게도 용서가 가능한지 물으며, 종교로부터 비롯된 인간 윤리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상기시킨다. 식당에서 나이프(칼)를 찾고, 운전 중 급브레이크를 밟고, 심지어 프란시스의 목을 죄는 등 순간순간 살인 충동을 느끼지만 올리비에는 결국 프란시스를 용서하고 구원한다.
영화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스승과 제자 관계로 돌아가는 올리비에와 프란시스의 '투 샷'으로 다소 싱겁게 끝이 난다. 아직 끝난 게 아닌 듯 끝나버린 영상은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를 다본 후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두 사람의 뒷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려보게 만든다.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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