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빅토리아 스위트 지음/김성훈 옮김/와이즈베리/1만6000원 |
샌프란시스코에 자리한 지역 공공병원인 ‘라구나 혼다’. 미국의 마지막 빈민구호소로, 노숙인·극빈자 등 사회 소외계층을 비롯해 알코올 중독자, 치매 환자 등 까다로운 만성질환자들이 몰려든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UCSF) 의대 임상부교수이자 역사학자인 빅토리아 스위트는 이곳을 ‘신의 호텔’(God’s Hotel)이라고 부른다. ‘신의 호텔’은 원래 17세기 아픈 이들을 무료로 돌보던 ‘파리 시립병원’을 일컫는 말.
신간 ‘신의 호텔’은 스위트 교수가 라구나 혼다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쓴 회고록이다. 파트타임 의사로 일할 수 있는 병원을 찾던 저자가 몇 달간 고생한 끝에 겨우 찾은 일자리가 라구나 혼다였다. 당초 두 달만 일할 요량으로 이곳에 왔던 이 내과의사는 이곳의 인간 중심적 분위기, 충분한 시간을 들여 환자를 돌보는 ‘느린 의학’에 매료되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이 병원에서 20여년을 헌신한다.
저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라구나 혼다의 특징으로는 인간적인 분위기, 풍요로운 시간, 지극히 사소한 것에 대한 배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병원에서는 환자의 침상 30여개가 늘어선 개방형 병동에서 수간호사가 24시간 이들을 관찰하고 돌본다. 환자들이 외로움을 덜고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개방형 병동은 19세기 간호사 나이팅게일이 권고한 방식이라고 한다. 자기공명영상(MRI) 촬영기기 하나 없고 시설도 노후한 이 병원의 기기라고는 엑스레이뿐이다. 그러나 이 병원에는 대신 ‘충분한 시간’이 있다. 의사들은 매일같이 침상 옆에서 환자를 오랜 시간 관찰하고 얘기를 나눈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이지만, 이런 방식으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의 확률이 높아지고, 오진과 불필요한 약물과 시술은 대폭 줄어든다.
환자들은 또 직접 온실, 과수원, 동물농장을 돌봤고, 넓은 홀에서는 환자들이 웃고 담소하면서 포커를 쳤다. 이 병원은 무기력한 환자들이 수용된 무미건조한 공간이 아니라, 활력이 넘치는 일종의 ‘마을 공동체’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환자들은 심리적 안정과 정신적 풍요를 회복할 수 있었다. 경제학자, 보건의료 행정관료들이 보기에는 느리고 비효율 투성이지만, 결국에는 놀라운 치유력을 보여줬으니 오히려 효율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산성과 효율’을 중시해 의사 한 명이 3, 4분에 한 명꼴로 환자를 진료하는 대도시 종합병원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의료환경이다.
![]() |
수많은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대형 종합병원. 이곳에서 환자 한 명은 의사들에게 과연 몇 분 동안이나 진료받을 수 있을까. 신간 ‘신의 호텔’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 인간 중심의 의료, 즉 ‘느린 의료’가 종국에는 효율적이라고 역설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이 책이 소개하는 흥미로운 임상사례와 병동의 일화를 읽다 보면 잔잔한 감동이 전해진다. 저자의 수려한 글솜씨까지 더해져 흡인력이 보통을 넘는다. 그리고 병원이 기업과 별반 다를 게 없이 운영되는 요즘의 현실에서 의료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한다. 최근 영리병원과 원격진료 등을 놓고 의료계와 정부가 파열음을 내고 있는 터라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더더욱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