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 한쪽에 하얗고 둥근달이 떴다. 한 개가 아니다. 10여개의 달이 한꺼번에 떴다. 온화한 빛깔에 넉넉한 몸매가 한국인의 인심을 보는 듯하다. ‘달항아리’라 불리는 원호(圓壺)를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다른 한쪽에는 빛깔은 비슷한데, 어깨가 당당하고 아래쪽으로 가면서 가늘어지는 모양의 입호(立壺)가 전시장을 채웠다. 굳건하게 버티고 선 모습이 강인한 인상의 남성을 연상시킨다. 백자 항아리 하면 달항아리를 떠올리지만 그와는 다른 매력이 넘친다.

백자 항아리 하면 달항아리를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회는 입호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드러내는 데 좀 더 힘을 주었다. 관람객들이 처음 만날 1전시실을 입호로 채운 데서 알 수 있다. 입호는 조선조 내내 대형으로 제작된 형태다. 풍만한 몸통에 당당한 어깨, 아래로 조금씩 좁혀지는 모양이 기본이다. 키가 50∼60㎝로 커서 물레로 한 번에 제작하지 못해 위 아래를 따로 만들어 붙였다. 전시품을 보면 어렵지 않게 붙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왕실 연회에서 꽃병이나 술병으로 사용한 것은 입호의 당당함을 빌려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1전시실을 ‘순백의 강건한 멋’이라고 한 것은 입호의 이런 특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눈에 익은 것은 역시 ‘순백의 온화한 둥근 맛’이라는 제목의 2전시실을 꾸미고 있는 원호, 그중에서도 달항아리다. 달항아리 10여점을 한 곳에 모았다. 백색과 온화하고 넉넉한 형태 때문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좌우대칭이 맞지 않은 약간 이지러진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은 오히려 매력이다. “편안함과 더불어 무한한 상상력을 일깨운다”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달항아리는 17세기 후반, 18세기에 주로 만들어졌다. 경기 광주 신대리, 가평 하판리 등의 가마터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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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호는 당당한 어깨에 아래로 내려가면서 좁아지는 형태가 강건한 인상을 풍긴다. 호림박물관 제공. |
담박하고 소박한 형태와 빛깔 때문에 백자 하면 서민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지만 백자는 왕실과 조선 지배층이 추구한 이념과 인연이 깊었다.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은 검소함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고, 그것이 순백의 장식 없는 백자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각종 의례에 사용할 그릇이 금속기에서 자기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수단으로서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대나무와 소나무 문양을 표현한 ‘백자양각송죽문호’ 같은 것은 조선이 백자에 투영한 이런 이념과 장식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절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사치 풍조의 만연을 걱정한 정조가 청화 문양마저 백자에 사용하는 걸 금지하자 사람들은 꽃, 풀 등의 무늬를 양각으로 꾸며 장식 욕구를 대신했다. 채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양각의 장식은 채색의 화려함을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방식은 일반적인 식기류보다는 문구류, 잔, 향로 등 특수기종에 사용하는 경향이 강했다. 탯줄을 봉안하는 용기로 백자가 활용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아기의 탯줄을 좋은 땅에 묻어야 건강하고 귀하게 자란다는 믿음이 있었다. 탯줄의 주인이 왕자, 공주라면 국운과도 관련되는 일이었다. 백자는 탯줄을 보관하는 용기로 가장 많이 사용됐다. 거의 무늬가 없는 것을 태항아리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보물 1055호로 지정된 백자태호를 만날 수 있다.
전시회를 기획한 유진현 학예연구팀장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백자 감상은 심심할 수 있다”며 “그러나 현대의 많은 도예가들이 청자보다는 백자에 더 관심을 기울일 정도로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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