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곳에 민감, 평생을 옮겨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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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패럴 크렐·도널드 L 베이츠 지음/박우정 옮김/글항아리/2만8000원 |
“그날 나는 실바플라나 호수 근처의 숲을 산책하다가 주를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옆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곳에서 이 사상이 내게로 왔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이 떠오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영원회귀 사상은 그의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본 개념이다. 사실 이 사상은 니체가 갑자기 얻은 영감이 아니다. 오랜 시간 머릿속에서 틀을 갖췄다. 그럼에도 니체는 저서 ‘이 사람을 보라’에서 “1881년 8월에 떠올랐다”고 못박는다. 그는 저서 ‘아침놀’에 대해서도 “이 책의 거의 모든 문장은 내가 홀로 바다와 친밀하게 대화를 나눴던 제노바 근방의 어지러운 바위 틈에서 부화한 생각들”이라고 설명한다.
니체는 머무는 곳에 민감한 철학자였다. 그는 사는 곳을 잘못 선택하면 천재도 둔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강한 내면, 심지어 영웅적인 내면을 낙담시키는 데는 독일의 기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신랄하게 말한다. 그에 따르면 천재에게 필요한 조건은 건조하고 맑은 공기다. 그는 오랜 경험으로 “토리노에서 밀라노로 가는 아주 짧은 여행에서도 습도의 변화로 인한 생리학적 영향을 계산”할 수 있게 됐다.
니체는 평생을 옮겨다녔다. 목사가 되기를 종용한 어머니 아래서 자란 소년은 유럽 학생들을 가르치는 문헌학자를 거쳐 위대한 사상가로 발전했다. 니체는 1844년 독일 작센주 작은 마을 뢰켄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동생이 숨지자 나움부르크로 이사했다. 그는 본·라이프치히 대학을 거쳐 24살에 스위스 바젤대학의 문헌학 교수로 임명됐다. 이곳에서 10년을 지냈다. 그는 이 시절에 대해 “비범한 힘을 쓸모없이 잘못 사용했다”며 어리석어했다. 이때 니체는 자신이 숭배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부부를 종종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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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글항아리 제공 |
니체가 쾌적한 환경을 갈망한 건 당연한 일이다. 니체의 아버지는 뇌의 액화괴사로 3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니체 역시 30대부터 편두통과 시력 저하, 위장장애에 시달렸다. 매독으로 인한 정신질환과 신체마비는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서서히 쇠락한 그의 마지막 10년은 쓸쓸하다. 1889년 이탈리아 토리노 광장에서 정신을 잃은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곧 가족의 간호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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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고지 엥가딘 실바플라나 호수의 남쪽 호숫가에 있는 쪼개진 바위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원회귀 사상을 떠올린 장소다. 글항아리 제공 |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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