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시집에는 데뷔작 ‘너와집’처럼 싱싱한 관능이 여전히 넘실댄다. 더 깊어진 사유에 출렁이는 몸의 리듬이 완숙하게 스며들었다. 박미산은 “하얀 나비 떼가 날아다녔어/ 내 몸에서 눈, 녹는 소리가 들렸지/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그도 스르르 녹아버렸어// 젖은 나의 방에서/ 증발한 그의 행적과는 무관하게/ 나는 매일 밤 명상하며 녹고 있지”라고 침대 위 ‘젖은 상상력’을 끌어들이다가 “그는 뉴욕에서/ 나는 서울에서/ 서로의 시차에 푹 젖으며 번지면서 녹는 거”라고 마무리한다.
이 시편의 제목이 ‘프라나’인데 이는 산스크리트어로는 숨, 인도 철학에서는 에너지, 혹은 기(氣)의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시집 뒤에 발문을 붙인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박미산 시의 토대가 ‘기의 상상력’이라고 설파했거니와, 태양의 혀를 닮은 박미산의 ‘기’는 죽음까지 휘어잡는다.
“꽃 화장을 한 그녀가 몇 겹의 나뭇더미에 누워 있어요 그녀가 움켜쥐었던 생이 불꽃을 터뜨립니다 붉은색, 푸른색, 하얀색 화장으로 몸을 바꾸며 뒤척입니다.// (중략) …새벽 달빛이 한쪽만 남아 있던 유방을, 부러진 다리를 밟으며 울퉁불퉁 마흔네 해를 덮습니다.”(‘예숙이’)
죽은 몸을 태우는 화장(火葬)조차 시인은 붉고 푸른색으로 화장(化粧)한다. 시신의 손발톱을 깎고 흩어진 머리카락을 주워 담는 ‘조발낭’을 표제로 삼은 시편에는 “당신을 부르는/ 11월 밤바람, 요령 소리// 당신은 홍련 꽃잎 떨어지듯/ 바다로 천천히 들어간다”고 썼다. 죽음을 넘어 생의 리듬까지 그윽하게 잡아내는 이런 시편에 이르면, 박미산에 깃든 시마(詩魔)의 깊이를 짐작할 만하다.
“단순한 리듬// 구부정한 생이 왔다 갔다 한다// 탄력이 붙는다// 포물선을 그리며 사라지는 산 벚꽃잎// 미끄러지는 봄”(‘셔틀콕의 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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