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밝고 아름다워야 하는가. 왜 눈이 부시도록 찬란해야 하는가. 새 출발을 기약하는 날, 새 희망을 가슴에 품는 날의 아침이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새 출발을 기약하는 사람, 새 희망을 가슴에 품는 사람의 마음이 어찌 마냥 어둡고 황량할 수 있으랴. 마음의 상태가 진정 그러하다면 그는 이미 새해를, 가까스로 그에게 돌아온 이 새로운 1년의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맞이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패배를 염두에 두고 떠밀리듯 스타트 라인에 선 육상 선수가 경기에서 결코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이치와도 같다.
새해 새 아침은 삶이 가장 공평하게 영위될 수 있도록 자연이 이 세상의 역사를 원점으로 되돌려주는 시간이다. 거기서 모든 존재들은 똑같은 조건, 똑같은 자격으로 다시 새롭게 출발한다. 과거는 문제되지 않는다. 성취를 이루었건 이루지 못했건 과거는 ‘과거’로서 일단 끝, 광막한 우주의 영원한 사이클에서 지금 우리는 과거를 묻고 이제 새해 새 아침이라는 이 새로운 시간의 스타트 라인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의 새로운 현실,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대자연의 질서는 얼마나 부조리할 것인가. 한 번의 실수 혹은 한 번의 행운이 영원을 결정해버린다면, 한 번의 승자가 영원한 승자이고, 한 번의 패배자가 영원한 패배자여야만 한다면, 한 번 영화로운 자는 영원히 영화롭고 한 번 궁핍한 자는 영원히 궁핍해야 한다면 그러한 삶, 그러한 역사에 대체 무슨 의미, 무슨 보람이 있을 것인가.
![]() |
| 그림=황주리 |
따라서 한번 패배한 자도 언제인가는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 한번 궁핍한 자도 언제인가는 영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최소한 그것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공평한 기회만큼은 지상의 모두에게 빠짐없이 주어져야 한다. 그래서 의로우신 우리의 신(神)께서는 이처럼 새해라는 시간의 한 계기를 만들어 그들이 과거에 이루어놓은 일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다시 원점에 서서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다.
새해 아침이다. 햇살에 눈이 부시다. 일어나 창문을 열고 문득 밖을 내다본다. 아아, 지난밤에 내린 눈으로 온천지가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거리의 헐벗은 가로수들이 정결하게 눈꽃들을 피웠다. 포도(鋪道)에 나뒹구는 낙엽들과 골목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오물들도, 늘어진 전깃줄과 퇴락한 빌딩의 어수선한 간판들도, 연기에 그을린 공장의 굴뚝과 가난한 달동네의 어설픈 지붕들과 도심의 회색빛 풍경들도 모두 하얗게 하얗게 지워져 버리고 없다. 밤 사이에 세상은 온통 순수한 한 장의 백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새 출발이란 과거와 결별한다는 것, 그러니까 과거를 하얗게 지워버리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새해 첫날을 색으로 표현할라치면 그것은 아마도―초록색도, 푸른색도, 노란색도 아닌―흰색일 터이다. 어느 시인이 그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神)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라고.
새해 아침은 정결한 한 장의 백지여야 한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온 세상이 눈에 덮여 하얗게 지워져 있어야 제격이다. 이날 내리는 눈을 서설(瑞雪)이라 부르고 비록 눈이 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관념적으로는 마치 온 천지가 눈에 덮여 화안하게 빛으로 가득 차 출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이리라.
새해 첫날은 빈 노트의 안 표지 같은 것, 쓸 말은 많아도 아까워 소중히 접어둔 여백이다. 새해 아침이다. 오늘만큼은 일찍 일어나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라. 어제의 세계는 이미 오늘의 세계가 아니다. 눈에 덮여 하이얗게 된 산과 들, 그리고 물상(物象)들의 눈부신 고요는 마치 신(神)의 비어 있는 화폭(畵幅) 같지 않은가. 그때 문득 당신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눈길에서 까치 한 마리가 모국어로 우렁차게 우짖고 있는 것을…….
오세영 시인
▲전남 영광 출생 ▲1965∼6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시간의 뗏목’ ‘봄은 전쟁처럼’ ‘문 열어라. 하늘아’, 학술 저서 ‘문학과 그 이해’ ‘한국현대시인연구’ ‘한국낭만주의시 연구’ 등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
▲1957년 서울 ▲이화여대 서양화과, 뉴욕대학 대학원 졸업 ▲1986년 석남미술상 ▲1999년 선미술상 ▲1980년대 중반 신구상주의 계열의 주목받는 화가 ▲화려한 원색을 바탕으로 도시적 인간의 내면 세계를 시적 언어로 표현하는 작가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반세기 만의 유인 달 탐사](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4/02/128/20260402520494.jpg
)
![[기자가만난세상] 노동신문 ‘혈세 논쟁’을 끝내자](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4/02/128/20260402520485.jpg
)
![[삶과문화] 인생의 작용과 반작용](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4/02/128/20260402520364.jpg
)
![[박일호의미술여행] 고단한 삶을 품은 풍경화](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4/02/128/20260402520408.jpg
)






![[포토] 박하선 '벚꽃 미모'](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4/02/300/20260402520703.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