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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②망년지교(忘年之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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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12-29 21:19:51 수정 : 2013-12-30 01:3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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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부끄러워하다’는 이름의 기생 화수(花羞)에게 그는 이런 섹시한 시를 써줬다. 첫 대목에 그 여인 이름을 새겨 넣었다. 어느 여인인들 가슴 뛰지 않을쏜가?

“옥 같은 얼굴 예쁜 자태 백 가지 꽃 무색한데(玉顔嬌媚百花羞·옥안교미백화수)/ 그대 주량 낙낙한 게 제일 큰 풍류로고(第一風流飮量優·제일풍류음량우)/ 웃으며 맞아준 정 깊고 또 깊어(笑待詩人情最密·소대시인정최밀)/ 사납고 못난 이 사람도 함께 놀아 주느니(?狂如我亦同遊·추광여아역동유)”

이 화끈한 구애의 시는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실렸다. 고려 최고의 글쟁이로 꼽히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별스런 면모 중 하나다. 제목은 ‘교방 기녀 화수에게 줌’. 교방(敎坊)은 당시 기녀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그들을 관리하는 기구다.

흰 구름처럼 자유로운 삶을 내내 흠모했음인가,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이름으로도 불린 그는 주몽을 주인공으로 세운 고구려 건국설화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써서 겨레의 기상을 불뚝 세웠다. ‘점령군’ 몽고의 억압에 대해 고려의 참혹한 상황을 들어 너그러운 조처를 부탁하는, 그 결과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둔, ‘진정표(陳情表)’로도 유명하다.

무신(武臣)정권 시대, 기구한 신세의 문신(文臣)으로서 젊어서는 방랑자처럼 살았으되 중년 이후 내내 (글 쓰는 일로) 펄펄 날았다. 벼슬도 만만치 않았다. 그 글, 이규보 문업(文業)의 바탕에는 망년지교(忘年之交)의 놀랍고도 훈훈한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역사 흘러 현대에 오니 지혜의 그 ‘망년’은 사라지고 ‘망가지는 술자리’로만 그 글자 남았다.

해질 무렵 새들이 둥지 찾듯, 한 해 저무는 세모(歲暮)엔 벗들 떠오른다. 벗보다 더 절실하게 부대껴온 일터와 거래처 사람들과도 뭔가 한 해 매조지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한 해[歲]가 저문다[暮]는 세모의 暮는 원래 없을 막(莫)자다. 위아래 두 풀숲[초(?)] 사이에 해[일(日)]가 끼어 서쪽으로 지는 해와 함께 하루가 저무는 모양이다. 갑골문(甲骨文)에서 비롯된 유서 깊은 글자다. 아래 대(大)자는 아래 ‘풀숲’ 모습이 세월 따라 변한 것. 갑골문은 중국 고대 상(商)나라 때 거북 배딱지와 소 어깨뼈에 점을 치며 새긴 글자다.

해질 무렵을 뜻하는 모(暮)자의 처음 글자인 막(莫)자 갑골문. 해 아래의 풀잎 모양이 세월이 흐르며 대(大)자 모양으로 바뀌었다.
문명의 새벽, 그땐 해 지면 따로 할 일이 없었다. 하던 일도 하지 말아야 했다. ‘저무는 해’의 (그림)문자인 莫자가 ‘없다’, ‘하지 말라’의 뜻으로 바뀐 것은 고대인들 마음속 시인들이 빚은 언어의 둔갑술일 터. 한자의 마음을 읽는(보는) 방법 중 하나다.

뜻이 그렇게 변하고 나니 원래의 ‘날이 저문다는 뜻’에 해당하는 말이 또 필요했다. 莫 아래에 해[日]를 덧붙여 暮를 만들었다. 찬란한 두 개의 태양을 써서 어스름 저녁을 빚어낸 상큼한 아이러니다. 중국 문자학에서는 이런 모양의 글자를 중첩자(重疊字)라고 푼다. 같은 글자를 겹쳐 쓴다는 것, 이런 모양의 한자 많다. 포갤 첩(疊)도, 나무 빽빽할 삼(森)도.

지는 ‘해’ 바라보며 새‘해’ 기다리는, 두 개의 태양으로 두 배의 찬란함을 보듬은 때가 바로 세모다. 그러나 송년회 또는 망년회는 이런 가슴 뛰는 기다림이나 보람보다는 ‘보내버린다’ 또는 ‘잊어버린다’는 뉘앙스가 진하다.

중국서 온 미세먼지까지 겹쳐 더 어수선한 이 풍진(風塵)세상 껄끄러운 티끌을 털어버리자고, 폭탄주·삼겹살·주지육림에 풍덩 빠져 세상을 잠깐이나마 잊자고 벼르는 모임이 요즘 망년회 아닌가. 술 덜 마시고, 우아한 공연과 전시를 즐기거나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자는 모임은 송년회다. 대충 (요즘 말의) 정의를 내려 보자면 그렇다.

오세재와의 ‘망년지교’로 또한 회자되는 이규보의 초상화.
여주이씨문순공파대종중 제공
아뿔싸, 그런데 원래 망년은 그런 단어가 아니라네. 나이(의 차이)를 극복한 지혜로운 이들끼리의 아름다운 우정을 설명하는 말이 바로 우리 역사와 전통의 망년이다. 어쩌다 착한 이 말이 이리 심하게 오염됐을꼬. 또 그런 미덕은 왜 우리 사회에 기억조차 아득한지.

뜻 맞는 이들끼리 나이[年]의 차이를 잊고[忘] 친교, 즉 사귐을 갖는 것이 우리 같은 한자문화권의 망년(망년지교·망년지우)의 뜻. 나이 말고, 인품과 학문의 높고 귀함을 따져 만나고 시(詩)와 바른 세상을 논하는, 상서(祥瑞)로운 만남이 망년이었다. 보통 연상인 이가 연하인 이에게 ‘벗으로 사귐’을 제안하여 모양새가 이뤄졌다.

고려 오세재(吳世材·1133∼미상)가 53세 때 35년 아래인 18세의 이규보와 마음을 열고 학문과 시를 주고받았던 일이 역사에서 두드러진 망년지교로 회자된다. 오세재는 당대 최고 문인 중 한 사람으로 ‘파한집’의 이인로·임춘·함순 등의 석학들과 어울렸다.

오세재 등의 각별한 우정에 ‘어린 친구’ 이규보는 기(氣)가 살았다. 자신을 알아준 연상(年上) 지기(知己)들의 선견지명에 평생 뛰어난 문장으로 화답했다. 시·거문고·술의 셋을 아주 좋아해 ‘심하다’는 뜻 혹 글자 들어간 삼혹호(三酷好) 선생으로도 불렸다. 또한 유명한 그의 ‘국선생전’은 술[누룩 麴(국)]을 기리는 소설. 강화도 길상면에 그의 묘가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도 길상면 양지바른 곳에 있는 이규보의 묘. 경기 여주 사람인데 몽고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옳긴 왕실을 따라 갔다가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강화군 제공
시중의 그 ‘망년회’는 일본의 음습한 세시풍속이다. 일제 때 경성(서울)의 요릿집 명월관에서 망년회(보넨카이)가 있었다는 기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나하게 마시고 모두 취한 속에서 빚은 ‘소통’으로 1년 스트레스를 푼다는데, 곱지만은 않다. 자주 술주정에 멱살잡이까지 난무하는, 그들의 풍속일 따름이다. 배울 바 없다. 이미 버렸어야 했다.

세모엔 모(暮)와 막(莫)의 속뜻처럼 ‘새로운 나’를 찾는 은은한 명상이 제격이다. 파란만장 다사다난 모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오로지 마음이 지은 것이라네, 부처님 말씀. 요즘 노래가사처럼, ‘미친 듯이 놀아보는 것’ 아니라도 세상엔 큰 기쁨 가득. 새해의 당신에게도.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장 ceo@citinature.com

■사족(蛇足)

망(亡)은 잃고 망하고 도망간다는 뜻. 그 아래에 마음 심(心)이 붙어 잊을 망(忘)이 된다. 心이 새로 만들어진 글자에서 ‘(마음이) 잊음’이라는 새 뜻[형(形)]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亡이 그 새 뜻 세우는 데 힘 보태는 동시에 소리[성(聲)]를 이루는 데도 영향을 미치는 형식으로 결합된 것[忘]을 형성문자(形聲文字)라 한다.

한자는 상형(象形)·지사(指事)·회의(會意)·형성의 네 가지의 방법으로 이뤄졌다. 물건의 모양[形]을 그린[象], 그림을 기호로 만든, 최초의 글자가 상형문자다. 숫자는 적지만 한자의 기본이고 핵심이다. 대조적으로 형성의 방법으로 지은 글자가 한자 중엔 가장 많아 전체의 85%가량일 것으로 추정한다.

상형과 형성의 이치만 깨쳐도 절로 밝아진다. 처음과 끝을 꿰뚫은, 시종일관(始終一貫)인 셈이니. 상형은 옛사람의 눈에 비친 사물의 첫 이미지다. 그 이미지들을 상하좌우 종횡무진 잇고 꿰어 만든 수많은 글자들이 형성이다. 지사와 회의도 그 ‘첫 이미지(그림)’인 상형의 활용과 응용이라는 점에서 본질이 같다.

노망 망언의 妄자는 ‘여자[女]에 홀렸다’는 뜻이 들어가서일 게다. 허망하다, 망령되다는 글자가 됐다. 忘자처럼 형성자다. 亡·心·女 등은 상형문자다. 한자는 상형문자 같은, 먼저 만든 글자를 재료로 하여 이들을 합체해 새 뜻 품는 새 글자 만드는, 기발한 레고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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